일제시기 ‘내선결혼’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고, ‘내선결혼’ 장려론은 이들 가족이 사랑으로 구성된다/되어야 한다고 전제했다. 하지만 사랑의 성격은 미묘하게 달랐다. 1910~20년대 ‘내선결혼’ 장려론은 비교적 육체적 사랑에 주목했다. ‘병합’(1910)과 3·1운동(1919)으로 서로에 대한 악감정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교제는 육체적 사랑 덕분에 가능하다고 상상되었다. 부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도달할 수 있는 추동력도 거기서 나왔다. 이때의 ‘내선결혼’ 장려론은 일본과 조선의 결합을 촉진하려는 의도에서 열정적 사랑을 선전에 활용했지만, 열정적 사랑은 일본과 조선의 분리도 상상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1930~40년대 ‘내선결혼’ 장려론은 정신적 사랑을 강조했다. ‘15년 전쟁기’에 돌입한 일본은 조선과 일본이 절대 떨어지지 않는 ‘내선일체’를 목표로 삼았다. 그를 위해 필요한 사랑이 경애였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인 경애는 상대방의 제반 조건을 이해한 다음에 생겨나는 정신적 사랑이었다. 이때의 ‘내선결혼’ 장려론은 일본과 조선의 분리 가능성을부정하려는 의도에서 정신적 사랑을 선전에 활용했지만, 조선인이 정신적·문화적으로 일본인에 동화되지 않는 이상 ‘내선결혼’의 실천을 억제했다. 이처럼 ‘내선결혼’ 장려론은 일본과 조선의 결합과 분리 불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 ‘내선결혼’ 에 주목하고,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을 선택적으로 선전에 활용했다. 하지만 두사랑 모두 분리 가능성과 결합 불가능성이라는 전복성을 내포했다. 이는 사랑이라는이데올로기의 속성에서 기인한 필연적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