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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시기 월북 종손의 종통 승계와 조상 되기-안동지역 혈연공동체의 세 종가 사례-

저자
배영동
서지
비교민속학
발간일
2020
조회수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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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한국전쟁 중에 종손이 사회주의 이념을 추종하여 월북한 이후 그의 종손 지위 인정과 그에 대한 조상숭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사례연구이다. 안동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20세기 전반에 양반가 출신의 사회주의자가 월등히 많았고, 한국전쟁 당시 세 종가의 종손이 월북하였다. 월북 종손은 월북 후 남한에서 종손의 역할을 한 적이 없지만, 혈연공동체인 문중(門中)의 족보와 제사 축문에는 종손으로 등재되어 계속 종손으로 인정받아왔다. 월북 종손의 정통성은 부계사회의 종법(宗法)에 따라 그의 장자 혹은 조카에게로 승계되었다. 그러나 월북 종손이 생존할 것으로 판단된 시기에는 문중의 제사에서나 대외적 활동에서 종손의 역할은 종손의 동생 혹은 장자가 대행하였다. 월북 종손이 남한에 부재하는 시기에 종손의 가족관계와 종손 동생의 가족관계에는 상당한 혼란이 발생하였다.
문중에서는 월북 종손의 종통을 인정하는 가운데 종손 월북으로 인한 공백을 그 장자나 동생을 시켜 메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차세대의 종손이 정당하게 종손의 지위를 승계하여 종가와 문중 운영을 정상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왜냐하면, 월북 종손의 경우 ‘종가와 종손 분리형’으로 종통 승계가 이루어졌고, 이것은 오늘날 종손의 경우처럼 ‘종가와 종손 일체형’ 종통으로 환원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 월북 종손의 사망 사실이 확인된 후에 그 영혼을 남한에 있는 종가 사당이나 무덤에 모시는 형식을 취했으니, 월북 종손은 ‘생시 이산(生時 離散)’ ‘사후 귀환(死後 歸還)’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북한이나 중국에서 생을 마감한 월북 종손의 영혼을 남한의 종가 사당과 무덤에 모심으로써 이산가족의 항구적인 영혼상봉을 실현하였고, 나아가 이산종가(離散宗家)의 화해와 봉합을 상징적으로 실천하여 새롭게 종통을 확립하고 문중정체성을 구성하였다. 월북 종손이 사후에 남한에서 영혼으로나마 ‘조상 되기’가 완성됨으로써 차세대 종손의 종통승계도 매듭지어졌다. 이것은 월북 종손보다도 현재의 종가에 사는 종손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형식과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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