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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曆中日記』를 통해 본 18세기 양반가 남성의 가사활동과 그 의미

저자
김명자
서지
조선시대사학회
발간일
2020
조회수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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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家는 유교 이념을 실현하는 구체적 현장이었다. 가 내에서 가사활동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유교의 실현 여부와 작동 양상을 알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18세기 가에서 이루어지는 남성의 가사활동과 그 의미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일반적으로 17세기 이후에는 성리학이 사회 저변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가족의 역할 및 남성의 가사활동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하고자 하였다. 둘째, 조선시대 남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정치인․관료․사상가․학자․지주 등의 관점으로 접근하였다. 가에서 남성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생활인으로서의 남성의 구체적인 모습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상 자료는 대구부 해안현 동쪽 칠계[옻골]에 거주했던 百弗庵 崔興遠(1705~1786)이 50여 년간 쓴 『曆中日記』이다. 일기를 통해 드러나는 남성의 가사활동에는 자녀 교육, 가족 부양, 봉제사ㆍ접빈객, 혼인 주선, 질병 관리 및 치료, 장보기 등이 있었다. 오늘날 여성이 더 큰 역할을 담당하는 교육, 장보기 등도 남성의 역할에 속하였다. 남성은 가정경영을 책임지는 가운데 가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매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생활 밀착형 존재였다.
이를 통해 다음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가사활동에는 부부유별의 원리가 작동하였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의 역할을 침범하지 않았다. 남성은 사랑방을 중심으로 그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가사 활동 및 가족의 사회화 역할에 더욱 집중하였다. 둘째, 효와 자애로 무장한 유교적 가치가 가족의 역할을 확대시키고, 이는 국가시스템의 미비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가 내에서 해결하도록 하였다. 셋째, 사당을 중심으로 한 가계계승의식이 일상 속에서 작동하였다. 유교는 가를 기반으로 한 종교로, 남성은 ‘가’에서 태어나 ‘가’를 위해 살다가 ‘가’에서 소멸해 가는 존재임을 남성의 가사활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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