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顔)씨가문은 위진(魏晉)시대부터 수당시기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유명한 호족 이었다. 비록 그들은 조정관료사회 중 고관대작으로 명성은 없었으나 높은 문화를 집안에 전수한 가문이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유학을 전수하는 것을 집안의 의무로 여긴 것이다. 특히 수당(隋唐)시기부터 안씨가문은 문화, 학술방면에서 않은 업적을 이룩한다. 이때 안씨가문은 경학(經學)으로 유명해지거나 문학사 방면에서 훈고학을 고증한 것으로 명성을 얻고 예술방면에까지 길이 이름을 남긴다. 이것은 안지추(顏 之推)의 학술사상과 큰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그는 이 방면에서 연구토론과 고증의 중 요성을 주장한다. 그는 학술사상의 윤리에서 가업계승의 중시와 사상의 내용에서 새 로운 것의 창조를 강조한다. 그의 학술사상의 형성에는 세 방면의 연원이 있는데 ‘안 지추의 위진남북조시기 학술에 대한 사상적 융합’, ‘안씨가문이 가진 학술사상이 안 지추에게 미친 영향’, ‘안지추가 현실학술사상을 거울로 삼은 것과 자기학문의 체득’ 이다. 안지추는 이러한 것으로 큰 학문적 성과를 이룩한 동시에 후대에 전수한다. 이 것은 안씨가문의 이후 문화발전에 아주 훌륭한 기초를 닦는 지도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