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컨텐츠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전체메뉴보기

전체메뉴보기

전체메뉴닫기
아카이브

논문

  • 홈
  • 아카이브
  • 인문DB
  • 학술연구
  • 논문
  •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구글 플러스 공유하기
  • 카카오 스토리 공유하기

조선후기 제주 어도(於道) 진주강씨가(晉州姜氏家) 고공(雇工)의 존재 양상 -강우석 소장 고문서를 중심으로-

저자
조정곤
서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발간일
2021
조회수
967
SNS 공유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구글 플러스 공유하기 카카오 스토리 공유하기
본 연구는 제주 於道里에 세거한 晉州姜氏 강우석씨 댁에 소장된 明文, 不忘記, 準戶口를 통해 이 가문에서 고용하였던 고공의 존재 양상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먼저 어도 진주강씨가는 17세기 중반 이후 上加里와 於道里에 거주하면서 대대로 留鄕座首와 留鄕別監을 역임하였고 이러한 사회적인 지위를 통해 또한 많은 재산을 소유한 가문이었다.
이 가문의 고공계약과 존재 양상에 대해 살펴 본 결과 17세기 후반 고공의 계약은 명문과 불망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공이 된 이유를 기재하지 않은 경우 명문을 작성하였고 채무와 같은 경제적인 이유가 기재되었을 때는 불망기를 작성하였다. 고공 계약의 이유는 대부분 同色馬를 비롯하여 채무를 갚지 못하는 등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었다. 이 당시 고공계약은 대체로 5년에서 8년으로 비교적 장기간 고공으로 계약하였다. 이 가문에서 고용하였던 고공의 규모는 17세기 후반에는 4~5명이었고 18세기에는 1~3명 정도였는데 대부분 2~3명 정도를 고용하였다. 그리고 18세기는 1~2명의 고공을 고용하였다. 이 가문에 고용되었던 고공의 성별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 고공이 조금 더 많이 고용되었다.
한편 주인이 육지에 거주하고 있는 외거노비가 고공이 된 사례를 이 가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주인과 멀리 떨어진 곳에 지내면서 타인의 집에 고공으로 계약하여 생계를 해결하고 주인에게 신공을 바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가족단위의 고공을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이 가문에 고공으로 고용되고 있거나 혹은 소유한 사노가 혼인하여 낳은 자식들이 고공이 되고 있어서 2세대가 함께 고공으로서 한 집에 의탁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공의 성격을 살펴보기 위해 신분, 연령, 기한 등을 검토하였다. 이 가문에 고공으로 고용된 경우 대부분 공노비와 사노비였으며 양인은 1678년에 한명만 확인된다. 공노비의 경우 대부분 內資寺·內贍寺·仁順府에 속해 있는 노비들이며 寺奴 혹은 寺婢로 그 소속이 어디인지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있다. 한편 1801년 공노비가 해방된 이후 고공의 신분을 살펴보면 대개 목자, 老閑, 향소서원 등으로 공노비를 확인할 수 없었다. 고공의 연령을 살펴본 결과 대부분 장성한 사람들이었으나 간혹 60대 이상의 고공도 확인된다. 그리고 자식을 낳자마자 고공으로 입적시키는 사례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공의 기한을 검토한 결과 대체로 5년 이상 장기간 고공으로 고용된 경우가 많았다. 이 가문의 고공은 고공 기간이 매우 장기화되어 앙역고공의 형태의 성격을 가지게 되고 아울러 예속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오랫동안 고주가의 집에 거주하면서 집안의 여러 雜役을 담당하였고 더불어 농업노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글
조선후기 경주 최부자댁의 가족구성과 노비경영 — 호구단자를 중심으로 —
다음글
채만식 문학에 나타난 ‘가족’과 ‘자본’:「심봉사」와 「흥부傳」 을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