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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적 개발 내셔널리즘과 낭만적 위선의 균열

저자
김지영
서지
한국여성문학학회, 여성문학연구 40
발간일
2017
조회수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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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반, 『여원』은 4.19의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청년 세대의 발언을 통해 ‘자아’와 ‘자유’의 이념에 바탕을 둔 ‘연애’의 자율성을 주창했지만 실제 역사나 경험과 유리된 무균질적인 이상은 군사 권력에 의해 국가주의가 부활하면서 곧바로 쇠잔해 갔다. 군사 정권의 개발 내셔널리즘이 강화되면서 『여원』은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기반하여 주부 역할을 강조했고, 사랑과 결혼의 근대화는 ‘자유’에 선행하는 ‘덕성’의 호명을 통해 국가 발전의 기획 내부로 통합되었다. 전통을 배격했던 근대화 권력이 여성의 덕성이라는 측면에서 부분적, 선별적으로 전통을 재호명함으로써, 서구 근대와 전통은 여성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율배반적으로 접속했다. 전통비판과 개발주의가 근대화를 추진하는 원심력으로 작동했다면 여성성의 가치로 재호명된 덕성은 물질적인 근대의 비인간적 질주를 통어하는 구심력으로 여성을 강박했다. 여성의 관용과 희생의 이름으로 호명된 전통 윤리는 개발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는 사적인 욕망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함으로써 사적인 삶과 공적인 개발을 갈등 없이 통합하는 가부장적 개발 내셔널리즘 체제를 성립시켰다. 가부장적 근대화가 추진되는 한편에서는 이혼율이 증가하고 자유부인 담론이 비등했다. 1960년대의 자유부인은, 戰後의 그것과 달리, 성욕과 물욕을 긍정하는 자본주의화 된 세계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성역할에 대한 저항과 거부의 의지를 함축했다. 1950년대의 자유부인이 아프레걸을 모방한 존재였다면, 1960년대의 자유부인은 젠더화된 근대성의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일그러진 정상성을 반증하는 경계인들이었다. 자유부인 담론의 이면에는 낭만적 사랑의 이데올로기가 은폐했던 젠더 억압의 가부장적 폭력성과 그에 편승한 타산적 편의주의에 대한 적나라한 자각이 노출되고 있었으며, 담론의 통합적 권력에서 벗어나는 이질적 사고와 경험들이 복잡하게 횡단했다. 낭만적 사랑의 이념에 충실했던 50년대의 ‘아프레걸-자유부인’과 달리, 60년대의 자유부인은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경험적 회의나 순결하고 신성한 사랑의 이념이 지니는 허위와 위선의 노출 속에 존재했으며, 따라서 60년대 자유부인 담론의 이면에는 성적 순결성과 혼인제도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에 여성 스스로가 소망을 일치시키는 자발적 동화가 지배적인 가운데, 매체의 ‘지식-권력’이 선택했던 것은 가부장 부재의 불안의식보다는 강력한 가부장에 대한 의존심리였다. 『여원』이 독보적으로 실어날랐던 성 담론은 본원론적 과학진단을 가장하여 가부장적 성역할의 구획과 젠더화된 국가주의를 보조했다.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과감하고 도발적인 성격을 가속화했던 성 담론은 표면적으로는 이데올로기의 표준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가상의 저항을 통해 있을 수 있는 반발을 보충함으로써 오히려 지배 제도와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데 복무하는 존속의 알리바이를 제공했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의 위선에 대한 의식적 자각과 성 담론이 제기한 미시적 균열들은 아프레걸론, 자유부인론으로 집약되는 가부장적 통제의지와 그로부터 빚어진 숭고한 사랑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1970년대 청년문화의 저항의식을 매개하는 촉매의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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