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화된 혐오와 전시되는 광기 : 한국 텔레비전드라마의 ‘악녀’ 연구
한국 텔레비전드라마에서 악녀들은 빠져서는 안 되는 주요 부속품처럼 거의 모든 작품에 삽입되어 극적 갈등을 일으키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 텔레비전드라마 속 악녀의 감정과 행동의 강도가 이전보다 훨씬 거세졌으며, 심정적인 분노를 자아내는 수준을 넘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그녀들의 행태가 급격하게 흉포해졌다는 사실이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악녀들은 ‘가족을 훼손한 대상을 향한 복수’와 같은 명분이 뚜렷한 이전 시대의 악녀들과는 변별되며, 성공이나 질투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고 악행의 대상이 여성이라는 유사성을 보인다. 또한 악행의 정당한 근거나 내적 갈등은 최소한으로 주어지고 마치 기계처럼 악행을 수행한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렇게 행동과 심정의 개연성은 부재하고 오직 악을 행하며 분노를 발산하기 위해 호명된 기계적 악녀들이 빈번하게 출현하면서, 한국 텔레비전드라마는 극단적 분노를 강요하는 분위기에 빠지게 된다. 위반의 쾌감과 파괴의 불안감을 제공하는 악인은 매력적인 캐릭터로서 극적인 사건과 감정을 위한 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다. 또한 악 자체가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텔레비전드라마가 악녀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개연성을 무시한 채 악녀의 광기에만 의존하는 일련의 작품으로 인해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조성된 분노가 텔레비전드라마를 장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