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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열녀 담론(사)와 미망인 담론(사)의 통계해석적 연구 : 17∼20세기 초 ‘여성생활사 자료집’을 통해 본 현황과 추이

저자
최기숙
서지
한국고전여성문학회,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5
발간일
2017
조회수
1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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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17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총 조선후기 여성 생애사 자료 총 2,328편을 대상으로 열녀 담론과 미망인 담론을 추린 280편의 텍스트를 선정하여 총 목록과 서지사항을 제시하고, 조선후기 열녀 담론(사)와 미망인 담론(사)의 현황과 추이에 대한 통계해석적 분석을 시도했다. 조선시대 열녀의 정려 기준을 정하는 문제는 17세기에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나, 18세기로 가면서 점차 남편을 따라 죽는 ‘자결’이 기준점이 되는 추세를 보였다. 자결을 택한 여성의 거의 대부분(70%이상)은 남편이 사망 직후, 또는 상례 후에 자결했다. 기한을 두고 자결한 경우, 이들이 가정 내적 의무를 종료하기까지 자결을 유예했다는 점에서 그 삶은 ‘기약된 죽음’에 다름없었다. 열녀에 대한 가족과 지역민, 사대부와 국가의 관심은 정려나 급복 등 사회적 보상으로 표현되었고, 개인적 차원에서는 글쓰기를 통한 역사ㆍ사회적 인정과 지지의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이는 ‘미망인’에 대한 사회적 ‘감시망’이 작동한 결과로 볼 수 있고, 여성의 자결은 이에 대한 자기 검열과 이념적 통제 결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자결 여성의 연령은 모든 시기에 걸쳐 20대가 가장 많았으며, 18세기는 30대, 19세기는 10대가 그 다음을 차지했고, 40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연령대에서 자결이 행해졌다. 여성의 자결은 대체로 음독이 우세했으며, 단식, 목맴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남편의 사망 후에 여성은 자기 돌봄을 소홀히 하거나 단념하여 건강을 해쳤고, 이는 자결과 사망의 경계가 불분명한 요인이 되었다. 시기별로 자결하지 않고도 살아서 지킨 열행만으로도 정려된 경우가 있었지만, 대체로 이는 19세기에 급증했다. 19세기말, 20세기 초에는 작가 개인이 ‘열’ 관념을 재정의하면서 근대 초기의 변화하는 시대적 위기를 ‘열녀’를 표장하는 형식으로 대응하려는 추세도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성 자신의 목소리나 의지가 배제된 채, 작가가 사망 여성의 심정과 의지를 대변하는 해석학적 도치가 개입되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미망인 담론은 18세기의 자료(66편)가 가장 많은데, 이 시기에는 자결하지 않은 이유를 구태여 서술하지 않은 자료가 전체의 82%(54편)이다. 전 시기에 걸쳐 미망인은 거의 모두 장수했다. 미망인은 자신의 정체성이 ‘미망인’임을 확실히 인식했으며, 담론 내용은 여성의 가정 내적 의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미망인의 기쁨이나 행복, 정서적 만족감 등을 기록되지 않아, 모종의 감정 통제가 서술 문법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초에 이르면 여성의 열행을 국가 행정과 윤리적 정통성의 모범으로 위치 지으려는 문화 정치의 시선이 확대되었으며, 여성의 의지와 심리, 정서조차 ‘남편의 마음’으로 대리-해석함으로써 여성의 당사자성을 박탈하는 해석학적 도치가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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