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컨텐츠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전체메뉴보기

전체메뉴보기

전체메뉴닫기
아카이브

논문

  • 홈
  • 아카이브
  • 인문DB
  • 학술연구
  • 논문
  •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구글 플러스 공유하기
  • 카카오 스토리 공유하기

들뢰즈의 차이 개념에 관련한 여성주의 재정립 가능성

저자
신지영
서지
한국여성철학회, 한국여성철학 7
발간일
2007
조회수
1425
SNS 공유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구글 플러스 공유하기 카카오 스토리 공유하기
이 논문은 들뢰즈에 대한 여성주의의 질문, 특히 그의 차이의 개념에 관련한 질문에 대해 답변하고자 씌어졌다. 이 개념은 두 진영 모두에게 매우 중대하고 또한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는 만큼 미묘하기 때문에, 그 정의를 분명히 하고난 다음에야 비로소 두 진영의 상호 의존 혹은 상호 긴장이 구체화될 수 있다. 차이라는 개념은 소수 진영에게 매우 유용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본성상 해체적이고, 이 성격은 다수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유추할 수 있다시피, 이 개념은 자기 해체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이 개념은, 다수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데 이용될 뿐 아니라, 그렇게 해체하는 어떤 원동력이 스스로 다시 권력이 될 수 없도록 스스로도 해체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차이 개념의 역설적인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여성주의와 들뢰즈의 차이 사이에 긴장이 형성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소수로서의 여성주의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과 들뢰즈의 차이 그 자체의 근본적인 해체적 성격을 화해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차이가 대표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여성주의가 스스로의 해체에 대해 불안해하며, 스스로의 재정립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들뢰즈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스스로 들뢰지안이라고 생각하는 여성주의자 브라이도티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브라이도티에게서 보듯, 들뢰즈와 여성주의의 화해는 들뢰즈를 비판하는 데서 구해지고 있다. 즉, 여성이라는 성적 차이는 해체될 수 없는 구조적이며 중대한 차이라는 것이고, 들뢰즈가 이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과연 들뢰즈의 차이는 여성주의에 유용한가? 들뢰즈의 차이로 여성주의를 구할 수 있는가? 이런 식으로 여성주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여성주의를 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여성주의에 <좋은> 것인가? 이에 우리는 우선 여성주의에서 말하는 여러 차이들과 들뢰즈의 차이 그 자체라는 개념을 비교하고, 들뢰즈의 차이를 전쟁기계로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기계는 그 어떤 중심화하려는 경향도 허용하지 않는 지속적인 내적 혁명으로서의 소수를 지지한다고 결론짓는다. 즉, 여성주의는 여성이라는 물리적 정체성에 얽매여서도 안 되는 지속적인 혁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여성주의가 여성적이라 불릴 수 있는 모든 소수를 여성주의 안에 포함시키고, 여성주의라는 이름의 미시 파시즘을 견제하는 것으로 재정의 된다면, 이는 들뢰즈의 차이 그 자체와 완벽히 부합한다. 들뢰즈의 차이로 인해 여성주의가 해체될까봐 염려하여 들뢰즈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들뢰즈의 차이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여성주의가 진정한 소수 전쟁기계로 재정의 된다면, 더욱 강력한 해체 능력을 지닌 여성주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글
일본인(日本人)과 부부(夫婦)-사전의 표제어 분석을 중심으로-
다음글
21세기를 위한 효사상과 가족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