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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렘(Wilhelm, 홍석구) 신부의 활동과 對韓認識 : 1883년부터 1895년까지

저자
장동하
서지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인간연구 13
발간일
2007
조회수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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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빌렘 신부가 사제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1883년부터 황해도로 파견되기 직전인 1896년 초까지 약 13년간 그의 활동과 한국에 대한 인식을 검토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루어진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인 빌렘 신부는 1883년 2월 17일 사제로 수품된 뒤 페낭신학교 교수로 첫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페낭신학교에 약 5년 개월간 재직하였는데, 여기에서 조선교구에서 유학을 보낸 한국인 신학생을 만나게 된다. 그가 재직하던 기간에 모두 21명의 한국인 신학생이 있었는데 중도에 돌아간 6명을 제외한 모든 조선교구 신학생들은 그에게 라틴어 수업을 받았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빌렘 신부는 조선에 관한 간접적인 견문을 쌓게 되었다. 이후 빌렘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참사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교구에 파견된다. 둘째, 빌렘 신부는 조선을 ‘새로운 조국’이자, ‘순교자의 땅’으로 불렀다. 그는 선교지로 온 조선을 자신의 조국처럼 여기고, 순교자의 정신을 본받겠다는 뜻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당시 한국에는 개신교 선교사들도 활동하고 있었다. 빌렘 신부는 가톨릭 신자만이 영원한 구원의 길에 들어선다는 구원관을 중추적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빌렘신부에게 있어 가톨릭과 다르거나 오류를 전한다고 판단한 개신교는 격파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조선이 순교자의 땅이지만 하급 관리들이 천주교에 대해 적의를 갖고 있고, 이것이 천주교 박해의 원인이라고 단정하였다. 셋째, 빌렘 신부는 제물포 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선교활동을 펴 나갔다. 그는 먼저 신자들의 구체적 생활 실태를 분석하여 대안을 모색하고, 신앙에 유익한 생활이 될 수 있도록 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시켜 나갔다. 제물포 본당 대부분의 신자들이 상업에 종사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주교에게 청하여 미사를 늘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성체를 조배할 수 있도록 신앙생활 환경을 개선하는 등 신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 나갔다. 또한 제물포에서의 적극적인 선교를 위해 그주변 환경을 분석하여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보다 안정적이고 확고한 선교 활동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땅을 매입하고 성당과 부속건물을 설립하여 제물포 지역의 천주교 선교 활동의 중추적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제물포 본당은 괄목할 만한 교세의 증가를 가져왔다. 넷째, 1890년 11월 1일, 빌렘 신부는 용산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고, 페낭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들과 상봉하였다. 빌렘 신부가 용산신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두 차례의 서품식이 있었다. 이 서품식들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 배론신학교에서 서품식이 있은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첫째는 1892년 3월 12일, 4명의 신학생이 삭발례를 함으로써 성직자가 되었다. 둘째는 1893년 3월 18일 6명의 삭발례와 2명의 수문품, 1명의 강경품 예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빌렘 신부는 1883년 페낭신학교 교수 시절부터 지도하였던 학생들의 서품을 지켜보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빌렘 신부는 리우빌 교장 신부의 사망으로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교장직을 수행하였다. 다섯째,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빌렘 신부는 1893년 8월 19일 조선을 임시로 떠나게 되었다. 국적 취득을 위해 파리에 가면서 빌렘신부는 뮈텔 주교로부터 선교자금을 모아 오라는 사명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가족과 고향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선교구 후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자금을 모으기 위해 조선에 관한 소책자 간행을 계획하기도 하였고, 여러 후원자들과 접촉을 벌이기도 하였다.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가족을 방문하여 그들의 소식을 전하며 선교 후원 자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을 추진하며 프랑스에 체류하는 과정에서 빌렘 신부는 세차례에 걸쳐 조선 귀국 연장을 신청하였다. 그것은 물론 선교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편지를 통해 빌렘 신부는 신학교 교수로 지내는 것보다 본당에서의 직접적인 사목활동을 선호한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사람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들을 변화시키고 인도하는 그러한 삶의 현장에 사는 것을 원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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