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소설은 표면적으로 신교육, 자유연애 등 문명개화를 부르짖고 있지만 일상적 풍속을 흥미롭게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문제, 즉 처첩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청상의 기구한 운명 등 전통적인 가족제도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사로잡혀 있다. 작가들은 이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의 모티브를 도입한다. 이 시기 소설에서 여행은 이국적인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주는 도구적 성격을 띤다. 유학은 인물의 세련됨을 부각해주는 장식적 효과를 낳고, 여행은 이국적 문명 기호의 나열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선망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이 시기에 근대는 서구적인 것과 동의어이고, 그 서구적인 일상을 누리는 것은 일종의 의무가 되며, 기존의 생활양식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폄하된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전혀 ‘문명’화되어 있지 못하다. 신소설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현실의 틈새를 메우려는 시도는 하지 않은 채, 새로움 앞에 당당함과 익숙함을 가장한다. 시선이 외부로만 향함으로써 자아의 내면은 무화되어 오히려 위축된 자아상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