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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드림]부끄러움이 질문하는 돌봄과 연결의 윤리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298
등록일
2023-08-0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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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부끄러움을 서사화하는 문학

지난해 ‘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을 연재한 전남대 인문학연구원 HK+ 가족커뮤니티 사업단 교수진이 올해 다시 칼럼을 이어갑니다. 본란은 넓은 범위에서 가족과 커뮤니티에 대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성찰을 시도합니다. 사업단은 ‘초개인화 시대, 통합과 소통을 위한 가족커뮤니티인문학’이라는 주제 아래 인문학적 성찰과 상상을 바탕으로 열린 가족, 신뢰와 조화의 공동체 문화를 연구·확산하는 데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한 점 부끄럼 없이’(만화그리는뻥, 2022) 

’한 점 부끄럼 없이’(만화그리는뻥, 2022)


일제강점기를 저항시인으로 살다 간 윤동주의 시편들 속에는 유난히 부끄러움이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별 헤는 밤’ 부분)이나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쉽게 쓰여진 시’ 부분)와 같은 시구들을 읽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문학에서 부끄러움이라는 주제와 만날 때, 문학은 일상에서 쉽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단편적인 부끄러움이라는 감정들을 다양한 맥락과 의미망 속에서 탐색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부끄러움의 주제를 이야기하는 서사들이 많이 있지만, 2016년 데뷔한 만화가 뻥의 동시대 한국 장편만화인 ‘한 점 부끄럼 없이’(만화그리는뻥, 2022)는 부끄러움의 감정을 탐색하는 서사들 속에서 각별히 주목할 만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 만화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주제로 삼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들의 분투를 조명하고 있다. 독자들은 궁금할 것이다. 사람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우리는 오히려 누구나 부끄러웠던 순간들에 대한 기억을 쉽게 떠올릴 수 있고, 유독 다른 사람들에 비해 부끄러움을 더 잘 느끼거나 부끄러움에 취약한 사람이 고민할 법한 생각, 즉 가끔은 차라리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지 않는가 하는 말이다.

 동시에 이 만화는 2018년 낙태죄가 존재하는 한국에서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선고 그리고 2021년 12월 31일 낙태죄 조항이 효력을 다하게 되는 실제 한국의 시간성을 따라 간다. 또한 2015년을 기점으로 페미니즘 리부트,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미투운동 등 한국에서 숨 가쁘게 펼쳐진 페미니스트 운동의 흐름들을 따라서 낙태죄 폐지의 타임라인을 2018년 스쿨미투의 현장과 교직한다. 그러니 ‘한 점 부끄럼 없이’는 동시대 한국 페미니스트 정치의 자장 속에서 ‘낙태죄 폐지’와 ‘스쿨미투’라는 서로 다른 의제가 교차하는 중심에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내어놓는다고 볼 수 있다.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재생산 권리(reproductive rights)와 재생산 정의(reproductive justice)의 개념을 중심으로, 스쿨미투는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성폭력을 비롯한 실제하는 권력 구조에서 발생하는 위력에 의한 차별과 폭력의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

 재생산과 성폭력은 인간 문화의 성적 레짐과 성 체계의 구성에 있어서 매우 핵심적인 논제일 뿐만 아니라,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계보와 역사를 두텁게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의제의 교차점을 ‘부끄러움’으로 설정하는 서사적 장치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한 점 부끄럼 없이’에서 이 부끄러움의 감정은 돌봄과 연결이라는 규범화된 관계윤리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부끄러움이 기존의 규범적인 돌봄과 연결의 폐쇄 회로를 넘어서게끔 추동한다. 그렇다면, 이 부끄러움으로부터 어떻게 윤리가 확보되는가?

 부끄러움의 양가성과 규범화된 돌봄/연결의 회로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조계원 옮김, 민음사, 2015)에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의 층위와 유형을 구분하고 부끄러움이 갖는 양가성에 대해 고찰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부끄러움에 대한 탐구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같다. 그 까닭은 부끄러움이란 유아가 특정 사회적 가치 체계의 정상적인 관점을 습득하기 이전에도 ‘원초적 수치심’이라는 이름으로 현상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아리스토파네스는 수치심을 ‘자신이 전혀 전지전능하지 않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정의했다.

 누스바움은 유아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연구들을 검토하면서 수치심이 ‘나르시시즘과 버림받음이라는 널리 퍼진 주제와 연관된다’고 설명한다. 유아의 원초적 수치심은 완전성과 통제력에 대한 불가능한 욕구와 함께 돌봄 제공자에 대한 자신의 의존성과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참조점으로 삼는다.

 이처럼 유아기로부터 수치심은 사회화 과정 속에서 우리 사회에 현상되어 있는 특정한 가치 체계의 정상성을 학습하면서 인간 생애 전체에서 감정 체계 중 일부로 기능하게 된다. 이때에도 수치심은 일종의 상실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며, 이는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과 동시에 과도한 욕심과 기대가 두드러지는 존재라는 인식 안에 존재하는 일정한 긴장을 해소하는 매우 일시적인 방법’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기에 누스바움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란 모욕이나 당혹감과는 구별되며, 혐오·죄책감·우울·격노와는 연관되지만 동일하지 않다.

 부끄러움은 나르시시즘적 완결성과 통제력에 대한 환상과는 거리가 먼 인간의 근본적인 취약성, 타자의존성, 불완전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더 뿌리 깊은 것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과의 ‘미묘한 상호 작용’ 속에서 상처 입을 가능성(취약성; vulnerability)에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스바움은 ‘건설적 수치심’이라고 이름 붙인 수치심의 이런 측면이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감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수치심이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공통의 인식, 공동체의 모든 인간을 포함하려는 인식, 이와 연관된 상호 의존과 상호 책임이라는 관념을 강화’하는 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누스바움은 부끄러움에 대한 이런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하면서도, 부끄러움의 양가성에 대해 경계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치심이 완전성과 통제력을 관건으로 하는 감정이라면, 이 완전성과 통제력에 대한 상실로부터 다시금 그에 대한 믿음을 확보하기 위한 심리적 작업으로 인해 수치심을 주로 사회의 소수자와 타자에게 투사함으로써 나르시시즘적 효과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치심은 낙인과 처벌을 통해 인간 문화 속에서 공유된 도덕적 가치를 표현하고 강화하는 방법으로 활용되어 왔다.

 이처럼 부끄러움의 부정적 측면은 규범화된 돌봄과 연결의 폐쇄적 회로와 만나 사회의 도덕감정을 조율하는 기제로 쓰이기 십상이다.

 부끄러움은 사회에서 ‘규칙을 어긴 구성원’을 낙인 찍음으로써 상호돌봄과 상호연결의 장 속에서 특정 인간을 배제함으로써 안전하고 완전무결한 나르시시즘적 ‘우리’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활용되기에 용이하다. 누스바움은 이러한 부끄러움의 감정이 ‘도덕적 공황’의 원인으로 지목된 타자들(반항적인 청소년들과 청년 집단들, 게이와 레즈비언들, 배회하는 갱단-으로 보이는 존재-들 등)을 배제하면서 규범화된 돌봄과 연결의 폐쇄 회로를 조직하는 양상을 서술한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긍정적인 방식과 부정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 양가적 속성을 갖고 있으며, 쉽게 타자에게 투사되어 규범화된 돌봄/연결의 회로를 강화하는 폐쇄적 공동체의 관계윤리로 활용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부끄러움으로부터 규범 너머 돌봄과 연결을 탐색하는 여자들의 서사

 ‘한 점 부끄럼 없이’는 2018년 낙태죄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국에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여성들의 임신 중단을 돕는 산부인과의 윤영의 초점화된 컷에서부터 시작한다.

 “여기는 여자만이 오르는 재판대이다”라는 서술이 산부인과용 검진대에 누운 여성의 몸과 진료를 하고 있는 윤영의 뒷모습을 초점화하면서 제시된다. 여기에 양수색전증이라고 이름 붙여진 질병의 집단발병으로 임신 중단 의제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이 추가된 허구적 설정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양수색전증은 발병한 산모의 60%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죽음과 낙태죄 처벌의 두 가능성 사이에서 윤영은 “언제나 그렇듯 여자들이 죽어나가도 세상은 변함 없”는 매일의 일상에서 처벌 받을 위험성이 병존하는 임신중단의 의료를 해나간다.

 그렇다고 윤영이 어떤 소명 의식을 갖고 있는 투사인 것은 아니다. 윤영은 자신이 개원을 하기 전 대학병원의 회식 자리에서 과장이 신입 간호사를 성추행하는 것을 다른 동료들과 함께 본다. 그러나 윤영은 신입 간호사가 그 말을 털어놓는 것에도 “그 말을 나에게 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생각하고, “내 말 한마디가 무얼 바꿀 수 없다는 것쯤은” 아는 인물이다.

 윤영은 “성공하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으며, “그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모른 척 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인물이다. 윤영은 무력함을 느끼며, 이는 윤영의 과거와 연관된다. 윤영은 간호사의 피해사실을 지지했다가 “너는 누구 편이냐”는 말과 함께 고립된 끝에 대학병원을 나갈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윤영은 “모르는 척”하는 것에 실패하고, 문제제기자를 낙인찍고 배제함으로써 수치심을 투사하는 공동체의 “공기”와 같은 정동정치 속에서 그 바깥에 서 있어 본 자로서, 이미 한 번 패배해본 적이 있는 인물인 것이다.

 그런 윤영의 서사를 추동하는 것은 그가 운영하는 개인병원에 남편이 교사로 있는 학교 교복을 입은 김은아가 임신중단을 원하는 환자로 내원하면서부터다. 윤영의 남편은 스쿨미투를 통해 가해자로 지목되고, 김은아는 스쿨미투의 주동자로 색출된다. 윤영은 이제 “우린 한 팀이잖아”라고 말하는 남편과 윤영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세상과 싸우려고 하는” 김은아 사이에 내몰리며, 서사적 현재와 교차하는 윤영의 삶의 시간성 속에서 다시 한 번 똑같이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윤영은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남편과 한 팀이 되어 김은아에게 수치심을 투사하고 모르는 척 함으로써 규범적인 돌봄과 연결의 범위 안에서 무감각해져야 마땅하다. 제도로서의 가족은 배우자인 윤영의 그러한 행동을 용인할뿐더러, 오히려 남편의 가해사실이 담긴 핸드폰을 훔쳐 포렌식을 맡기는 윤영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윤영의 시점을 따라가는 서사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하는 시간성을 교직하면서 임신중단이든 성폭력 고발이든, 임신중단 당사자와 성폭력 피해자를 고립시키고 배제하는 회로의 동일성에 부끄러움의 전가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에 가장 주목할 만한 시퀀스는 윤영이 자신의 친구이면서 인권변호사로서 피해자의 대리인이기도 한 임서정을 찾아가는 부분이다. 남편은 윤영에게 변호사 친구를 만나보라고 종용한다. 윤영은 김은아에게 과거의 자신을 투사하면서, 핸드폰 번호를 물어 왜 자신처럼 패배할 싸움을 하냐고 물어보고 싶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임서정은 “널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 네 남편 말고 너.”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건넨다. 변호사 사무실의 문이 닫히고, 윤영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어져있다.

 왜 이 시퀀스에서 윤영은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가? 윤영은 임서정이 자신을 오해했음을 안다. 임서정은 윤영이 남편을 돕기 위해 자신을 찾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윤영은 이 시퀀스에서 “나만은 안전하다고 기대”한 믿음에 대해 안전한 곳은 실은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는다. 안전하고 완결적이며 통제가능한 공동체는 수치심을 타자에게 투사한 자리에서만 겨우 일시적으로 가능하며, 수치심은 언제든 윤영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자리를 바꿔 투사될 수 있는 까닭이다. 수치심의 투사로부터 구성되는 돌봄과 연결의 공동체는 더 규범적인 것의 회로를 따라 흘러다니며 언제라도 또 윤영에게로 투사될 수 있다. 윤영이 이미 한 번 경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한 점 부끄럼 없이’는 윤영과 김은아의 시점을 병치하면서, “기꺼이 모른 척 할 수 있었”으며 “그저 가만히 있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나만은 안전한” “약속과 지붕”이 정말 약속하는 것은 실은 아무 것도 없음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한 점 부끄럼 없이’에서 부끄러움의 감정은 돌봄과 연결의 한계와 경계를 구획 짓는 규범화된 관계윤리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기존의 규범적인 돌봄과 연결의 폐쇄 회로를 넘어서서 “한 걸음” 나서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기 위해” “알고자 하는 마음”만이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이 약속의 폐쇄 회로에 대한 유일한 대안임을, 우리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처 입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부끄러움으로부터의 자유가 보장된 공동체는 없음을 성찰하고 있다.

 이제는 안다.

 증표는 당신들이었다.

 주저하면서도 맞서고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개발해내는.

 누구보다… 발을 뻗어 삶으로 달려가는 네가.(‘한 점 부끄럼 없이’, 229쪽)

 그리하여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를 정동하고 ‘타자’로부터 정동되는 부끄러움의 인정과, 그로부터 규범 너머에서 ‘사랑을 개발해내는’ 공적 관계윤리의 확보라는 돌봄/연결의 페미니스트 윤리에 있음을 ‘한 점 부끄럼 없이’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통해 우리가 열려있음을 의미한다.

 정미선(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기사내용 원문보기: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63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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