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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드림]아이들이 놀 자유를 허락하라!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933
등록일
2022-02-0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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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 (19) 우리 사회 아이를 다루는 방식
“아이들은 원래 소란” 인내 못하는 어른들

픽사베이 이미지.
픽사베이 이미지.

[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 (19) 우리 사회 아이를 다루는 방식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 시대 아동은 부모에 종속된 재산 취급을 받는 존재로, 물건처럼 매매가 되거나 부모의 죄를 대신해 죽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서도 아동이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생계를 거드는 일은 당연시됐다.

 1920년대 초 무렵이 되면서 아동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대우하자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우리나라는 1922년 ‘어린이날’을 선포하였는데 1925년의 ‘국제어린이날’보다 3년이나 앞섰다.

 1923년에는 ‘아동인권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는 1924년의 UN ‘아동권리선언’보다 앞선 것으로 세계 최초이다. 당시 인권선언에는 어린이에 대한 완전한 인격적 대우와 만14세 이하 어린이 노동 금지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하지만 14세 이하 어린이를 동원한 노동은 그 이후로도 상당 기간 지속됐다. 1920년대 일본 내 아동 취업 금지와 연소자 노동시간 제한 등을 골자로 하는 ‘공장법’이 시행되었지만,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 이 법을 적용하길 꺼렸다. 오히려 조선에는 공장법이 없어 아동 노동과 연소자 장시간 근무가 가능하다는 점을 내세워 일본 면방직 공장 등을 조선에 끌어들이는 데 활용했다. 우리나라 아동 노동 금지는 일본이 패망한 후 1946년에야 겨우 법적으로 강제되었다.

 아동의 지위 향상과 보육 강화 역사

 하지만 법이 있어도 당장 먹고 살기 바쁜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돈벌이에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 차원에서 아동 취업을 금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은 의무교육의 시행이었다. 부모에게 자녀를 학교에 보낼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초등과정 의무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6세 이상 어린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더 어린 아이들은 갈 곳이 없었다. 특히 가정 형편이 어려울수록 사정은 딱했다. 부모가 모두 돈을 벌러 가야 했지만,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많은 아이들이 집안에 방치된 채 희생되었다.

 1990년 3월 9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한 연립주택 지하 셋방. 경비원 일을 하는 아빠(30)와 파출부를 나가는 엄마(28), 그리고 딸 혜영(5)과 아들 영철(4) 등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젊은 부모는 아침 일찍부터 일을 나가야 해서 두 아이가 먹을 아침밥과 요강만 넣어둔 채 밖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여느 때처럼 집을 나섰다. 아침밥을 먹어 치우고 좁은 방안에서 딱히 할 게 없던 남매는 성냥불 장난을 하게 됐고, 이내 화재로 번져 문밖으로 나오지 못한 남매는 숨지고 말았다.

 1990년 발표된 정태춘의 노래 ‘우리들의 죽음’을 통해 아직도 슬픈 기억으로 전해지는 사건이다. 당시 문을 잠그고 나간 부모의 행동을 비난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정태춘은 무엇이 이 참혹한 사건의 진실인지 알려주었다. 의무교육 이전 미취학 아동, 특히 영세한 가정의 아동은 보육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꼭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1990년 이후 일하는 부모들이 아이를 안전하게 맡길 수 있는 보육시설이 점차 늘어났다. 1991년에 제정된 ‘영유아보육법’으로 인해 아동 보호와 교육이 통합된 보육사업이 시작됐고, 2013년부터는 국가가 0~5세 아동 전체에 대한 무상보육을 책임지는 시대가 열렸다.

 ‘노키즈’ 놀 자유를 박탕당한 아이들

 아이의 보육을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움직임이 차근차근 시행되는 중에도 한쪽에선 반대로 아동 인권이 후퇴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2014년 무렵부터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을 받지 않겠다는 ‘노키즈존’이 새롭게 생겨났다. 아이들의 소란이 다른 손님들을 방해한다는 것이 출입금지의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제는 아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않는 부모에 대한 불만이 더 컸다. 여기에 더해 냄새나는 기저귀를 테이블에 그냥 두고 갔다는 몇몇 부도덕한 부모에서 시작된 ‘맘충’이란 혐오 용어가 퍼지기 시작하였고, 어느덧 공공장소에서 소란 피우는 아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부모 일반에게까지 ‘맘충’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공공장소 생활법을 배우며 성장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 과정 중에 있는 어느 아이, 어느 부모라도 조금은 미숙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잘 용납되지 않은 세상이었다. 지금 성인들이 ‘옛날에 아이였던’ 시기보다 ‘요즘 아이들’의 소란이 참지 못할 정도로 유별난 것은 아닐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예전 어른들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인내했던 반면 요즘 어른들은 인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문제점은 어른들의 것이었지만, 발현된 형태는 ‘노키즈’의 모습이었다. 아이들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의 공간은 점차 박탈되어 갔다.

 외출을 포기하고 집에 있다고 해서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아파트 거주 비율이 60%가 넘어가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윗층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늘 아랫층에 죄인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늘 부모에게 ‘뛰지 마라’, ‘조용히 해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혼이 난다.

 아이들의 공간이라 여겨졌던 놀이터도 이제 편한 공간이 아니다. 지난 2021년 10월, 인천의 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이 놀이터에서 놀던 다른 아파트 초등학생 5명을 붙잡고 ‘남의 놀이터에 오면 도둑’이라며 감금·협박한 것이 알려져 사회적 파장을 불러 왔다. 심지어 자기 아파트 놀이터에서도 소음 항의 때문에 마음껏 뛰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름철 아파트 정원의 분수대에서 아이들 물놀이 소리가 시끄럽다며 관리사무소에 전화해 물을 빼고 출입금지 현수막을 내걸기도 한다.

코로나 시대, 다시 집으로 쫓겨 들어간 아이들

 작년 한 해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문화 상품인 ‘오징어 게임’을 본 한국인은 ‘맞다, 나 어릴 때 친구들이랑 저 놀이했었지’라며 추억에 잠겼다. 그리고 그 시절 친구들과 오징어게임 속편이 나온다면 꼭 나왔으면 하는 놀이를 쉴 새 없이 쏟아냈다. ‘다방구’, ‘돈가스’, ‘술래잡기’, ‘우리집에 왜 왔니’, ‘고무줄 놀이’ 등. 그런데 우리가 온 동네를 누비며 즐겼던 그 놀이를 요즘 아이들은 즐길 수 있을까? 아마도 ‘시끄럽다’는 항의에 곧 쫓겨나야 할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공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지난 2017년 출판된 김희경 작가의 ‘이상한 정상 가족’에 소개된 넬슨 만델라의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라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과연 우리 사회의 영혼은 어떠한가? 삶이 고단하다 하여 작은 불편함도 참지 못하고,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폭발할 정도로 인내심이 바닥난 세상. 가장 마지막까지 참고 보듬어줘야 할 대상인 아이들이 거꾸로 가장 만만한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닌가?

 코로나19가 세상을 강타한 지 만 2년이 흘렀지만, 일상 회복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오미크론의 유행으로 전 세계 확진자는 오히려 지난 2년 내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광주 역시 오미크론 확산이 심각한 지역으로, 2주간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대한 긴급휴원 조처가 내려져 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많은 곳에 갈 수도 없다. 아이들은 다시 집으로 쫓겨 들어갔다. 혹시 위층에 아이가 있다면, 집에만 머물러야 하는 아이들의 답답함을 조금씩 이해하고 아이들에게 집에서 놀 자유를 허하는 것은 어떨까?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라도 말이다.

조상현(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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