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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드림]‘차이’에 기초해 위계가 구축되다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073
등록일
2021-11-1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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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 (14) ‘차이’에 초점 맞춘 다문화 이해와 ‘다문화아이’

이미지 출처=픽사베이. Clker-Free-Vector-Images.
이미지 출처=픽사베이. Clker-Free-Vector-Images.

[언택트 시대, 새로운 컨택트 사유하기]

얼마 전 한 일간지에 필리핀에서 살다 귀국한 한 ‘다문화아이’의 이야기가 실렸다. “나도 한국사람, 제발 한국어 좀 가르쳐 주세요!”( 한겨레신문, 2021년 10월 21일자)
그는 필리핀 태생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은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그를 필리핀 이모님 댁으로 보냈다. 그렇게 하여 그는 필리핀에서 사촌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필자의 눈을 끈 것은 그가 부모님과 함께 하지 못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매우 행복했다고 회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엄마가 한국에서 보내준 ‘발릭바얀 상자(Balikbayan box)’ -‘Balik’과 ‘Bayan’이 조합된 단어로, ‘본국으로 귀환’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해외 거주 필리핀인이 자국에서 생활하는 친척이나 자녀에게 보내는 선물박스를 의미한다. 면세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속에 담겨 있던 온갖 과자와 사탕, 예쁜 옷과 학용품을 사촌들과 나누면서 느꼈던 행복감을 그는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가 만약 다른 다문화아이처럼 한국에서 자랐다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행복했다고 기억할까라는 생각에 미쳤다. 나는 선뜻 긍정적인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부모님의 직접적인 사랑을 느끼며 자랐을지는 몰라도, 그는 한국사회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다문화가정 자녀로서 ‘다문화아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다문화가족 전체 ‘취약계층’과 동일시

1990년대 한국사회에서 처음 사용된 ‘다문화주의’는 문화적 ‘차이’에 대한 승인의 의미보다는 한국인의 외국인차별과 폭력성에 대한 대항적 개념이었다. 다문화주의는 한국사회 주류구성원의 ‘반성’과 ‘성찰’을 요청하는 담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다문화’는 낙인과 배제를 위한 용어로 변질되었다는 지적이 늘어만 가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이래 언론을 통해 가공되고 유포된 ‘다문화’ 이미지를 각인한 것은 피부색이 다소 짙은 동남아시아 또는 아프리카 출신 이주민이었다. 그것은 다문화에 대한 매우 협소한 이해를 낳았다. 그리하여 한국사회에서 다문화 현상은 이른바 ‘농촌 총각’들에게 시집을 오는 또는 우리에게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동남아시아 또는 그 외 다른 외국 출신 이주민의 증가를 의미하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이러한 다문화 이미지에 기대어 다문화가족 전체를 ‘취약계층’과 동일시하고, 그들을 온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주류사회의 우월의식을 낳았고 동시에 외국인 혐오를 수반했다. 한국인이 다문화를 이해할 때, 문화 간 ‘동일성’이나 ‘유사성’ 보다는 ‘다름’과 ‘차이’에 초점을 두게 된 것도 그러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차이’에 기초한 다문화 개념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사안이다. 서로 평등하지 않는 관계 속에서 ‘다름’에 대한 인정은 이주민을 주류인 ‘우리’로부터의 배제, ‘조화’에 대한 강조는 강자(‘우리’)에 대한 약자(‘그들’)의 복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타기에프(Taguieff)는 ‘차이’에 기초한 위계 구축의 논리를 ‘차이 중심 인종주의(differential racism)’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 이 ‘차이 중심 인종주의’는 한편으로는 ‘우리’와 다른 인종과의 차이가 절대적임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문화가 다른 문화는 서로 공통성이 없음을 과장한다. 이러한 논리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절대성에 집착하는 우리사회의 단일민족주의 의식과 쉽게 연동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중심 인종주의’는 ‘가면에 의해 가려진 은밀한 인종주의’에 불과하다는 점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초등 교과서 속 사회적 소수자로서 ‘다문화아이’

우리의 초등교과서 역시 ‘다문화’와 연관하여 선주민과 이주민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초등교과서에서 다문화가정과 그 자녀는 ‘사회적 소수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심각한 교육적 문제를 수반한다. 초등교과서의 서술 논리를 따라가면, 다문화가정 자녀는 어머니의 출신 나라의 상이성을 토대로 일반 아이들과 ‘다른’ 존재로 정의된다. 그러한 정의에 따라 다문화가정 자녀들은 필연적으로 이중문화를 갖게 되고 그러한 이중문화 ‘사이에 낀’ 존재가 된다. 

‘사이에 낀’ 존재로서 그들은 손쉽게 ‘타자화’ 되고, ‘정상적인’ 아이들에 비해 학교 및 사회생활에서 ‘부적응’할 확률이 큰 존재로 묘사된다. 이러한 서술의 논리적 종착점에서 ‘사회적 갈등의 잠재적 원천’으로서의 다문화가정 자녀라는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들은 부모님들이 애를 먹는 골치 덩어리가 되고 사회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잠재적 문제아가 된다. 여기에 덧붙여 다문화가정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하는 약자로 그려진다. 이제 국가와 사회로부터 시혜의 대상인 사회적 약자이자 잠재적 갈등 유발자로서의 다문화가정 자녀에 대한 이미지가 완성된다. 결국 국가와 우리 사회가 다문화가정 자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도 바로 그들이 사회적 갈등 유발자로서 성장하지 않길 바라는 기대 때문이 아닌가? 

또한 초등교과서가 다문화가정 자녀를 어머니의 출신 나라의 ‘다름’을 토대로 ‘사회적 소수자’로 분류하는 것은 그들의 ‘열등성’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들의 열등성은 그들의 인종적 ‘혼혈’에 있는 듯한 인상을 매개한다. 

실제로 초등교과서의 삽화와 서술에서 다문화가정 자녀는 무엇보다 ‘남다른 외모’와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가진 아이들로 묘사된다. 피부색과 외모를 정보의 전면에 내세우고 그것을 토대로 서열을 매기는 것은 다분히 인종주의적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근거로 따로 그들을 따로 ‘분류’하는 것은 학생들 사이에 ‘경계’를 설정하는 것과 같다. 인종주의는 애당초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주장에 도전하는 이념으로 기획되었다. 인종주의는 ‘우리’의 우월적 지위는 분류 자체의 기준, 즉 인종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우리’의 순혈적 가치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인종주의적 논리에 따르면, 어머니의 출신 나라의 ‘다름’은 다문화가정 자녀에게 열등성을 부여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한쪽의 열등성은 다른 쪽의 우월성을 지시하고 그것은 둘 사이의 동등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요컨대 사회적 소수자로의 분류 논리를 따라가면, 다문화가정 자녀는 일반 학생들의 ‘동등한’ 친구로서 인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열등한’ 존재는 동등성을 기반으로 하는 친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이 주류사회의 구성원이라 믿는 친구들은 ‘타자’의 품위를 떨어뜨려 ‘타자’가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 없게끔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바로 ‘다문화 왕따’가 유행할 수 있는 배경이다. 

“너는 어디에서 왔니?” “너의 어머니는 어디에서 왔니?”

흔히 한국사회의 주류구성원은 다문화가정 자녀에게 출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은 그들이 우리랑 혈통적으로, 민족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구별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질문은 다문화가정 자녀를 ‘절반의 베트남인’으로, 순수 ‘우리’가 아닌 의심쩍은 ‘타자’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사회에 정당하게 소속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의 경계를 긋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다문화가정 자녀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인 가족에 둘러싸여 압도적 한국문화 속에서 성장한다. 그들이 한국사회에서 ‘다문화가정 자녀’라는 이름의 특별한 ‘타자’로 분류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통상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이다. 
교사가 그들을 ‘다문화’라는 명칭을 통해 호명함으로써, 학급에서 그들과 다른 일반 학생들 사이에 일종의 사회적 분리가 진행된다. 이때 그들에게 다문화가정 자녀의 또 다른 이름인 ‘다문화아이’라는 표현은 자신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용어로 느껴진다. “너도 베트남어 잘하니?”, “너 베트남 사람이야 아니면 한국 사람이냐?”라는 질문 역시 ‘의도되지 않은 인종주의’의 표출이다. “너는 외모로 보아 한국인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칭찬(?)하는 것 역시 그러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한 ‘선의’의 발언의 뒷면에는 그는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 또는 절반의 한국인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숨겨져 있다.

흔히 한국사회의 언론은 다문화가정 자녀의 학교부적응 문제를 염려하면서 그들의 ‘이중문화’를 거론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문화적 ‘차이’는 미미하며, 있다고 해도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우리는 무엇보다 다문화가정 자녀를 교육적으로 대할 때, 그들을 특별한 범주로 묶어 타자화시키고 배려와 시혜의 대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을 ‘다문화아이’로 분류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타자’로서의 의식을 갖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와 함께 미래를 함께 일구어가는 능동적 주체로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대희 (전남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기사내용 원문보기: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611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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