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컨텐츠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전체메뉴보기

전체메뉴보기

전체메뉴닫기
소식

언론에 비친 사업단

  • 홈
  • 소식
  • 언론에 비친 사업단
  •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구글 플러스 공유하기
  • 카카오 스토리 공유하기

[광주드림][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11) 행복의 약속과 전치(轉置)의 논리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253
등록일
2021-09-29 09:50
SNS 공유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구글 플러스 공유하기 카카오 스토리 공유하기

[언택트 시대, 새로운 컨택트 사유하기]
(약속의 몰락굚 또다른 약속으로 대체

픽사베이 이미지.
픽사베이 이미지.

약속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무엇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미리 정하는 행위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하는 약속은 한 사회 혹은 체제가 소속 구성원에게 다짐하는 행복의 약속으로, 개인적 차원에서는 미래와 성공에 대한 전망이며 사회적 차원에서는 지금의 상태보다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회와 체제는 구성원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삶의 의지를 북돋운다. 그 이유는 더 나은 내일에 대한 바람이 이루어지리라는 ‘약속’이 없는 사회는 활기와 역동을 상실할뿐더러 더 나아가 현 사회에 대한 실망과 희망 없는 삶에 대한 분노로 인해 일상이 폭력으로 전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사회적 ‘약속’의 대표적인 예다. ‘아메리칸 드림’은 이민자로 구성된 나라, 미국에서 풍요로운 자원을 기반으로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약속이 국가의 정체성으로 가시화된 것이다. 

물론 이민 장벽을 공고하게 세우고 있는 지금의 미국에 ‘아메리칸 드림’이 곧이곧대로 적용될 수는 없지만 한동안 ‘미국의 정신’으로 받아들여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의 약속도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는다. 

‘아메리칸 드림’ 또한 인디언 원주민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역사적으로 구조화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라는 기만 위에 세워져왔던 것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1%의 성공한 흑인이나 인디언 외에 대다수의 소수인종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체계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래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꿈이었던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뭘 약속하고 있나?

그렇다면 이런 기만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칸 드림’이 미국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그 이유는 ‘아메리칸 드림’이 단지 물질적 성공과 풍요에 대한 약속이었을 뿐 아니라, 구성원들의 삶과 문화를 직조(織造)하는 ‘가치’에 대한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근면·성실하게 최선을 다한다는 삶의 가치, 그리고 거짓과 협잡, 투기와 사기가 아니라 정직한 노동의 열매를 사회가 보상해주리라는 가치, 더 나아가 이런 가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의 실천이 쌓여서 빚어내는 사회적 인정(認定)을 ‘약속’함으로써 사회적인 삶의 역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요컨대 ‘아메리칸 드림’은 많은 개인에게는 노력의 대가로 성공이 주어지리라는 확신을, 사회적으로는 부자나라에 대한 열망과 실현을, 문화적으로는 성실과 정직을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가치를 약속했던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몇 마디의 말로 단순‧명쾌하게 해명하기에는 다양한 ‘약속의 복잡성’을 함축하고 있지만, 어쨌건 내부적으로는 미국 가치를 통합하고, 외부적으로는 ‘자국민 우선주의’, ‘미국 패권주의’를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한 것도 사실이다. 

이제 한국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압축 성장으로 규정된 한국의 현대사에서, 우리 사회의 ‘약속’은 민주사회에 대한 열망과 교육을 통한 성공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희생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뤄왔다는 점을 한국 현대사가 증명한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한국의 꿈’의 약속이 정의롭고 공평하게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고 있다. 

최근 ‘헬조선’이나 ‘금수저/흙수저’ 논란은 ‘약속’의 공허한 유예(猶豫)를 보여주는 피상적인 현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독재정권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형식적 민주화는 오히려 우리 사회의 권력집중과 정치적 협잡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실질적 민주화의 길이 너무나 먼 것임을 각인시켰다. 같은 시기에 급속도로 자본주의화 되고 시장화 된 일상은 빈부의 계층 간 차별을 구조화하면서 오히려 부동산, 주식, 가상화폐 등을 위시한 투기를 사회적 성공의 지름길로 인식케 했다. 

교육은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겨지지만, 인간 또한 투자에 상당하는 이윤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인간자본’의 경제원칙에 따라 부의 소유 여부와 정도에 따라 교육의 수준과 질이 결정되는 현상을 고착화 하는 데 역기능적 역할을 했다. 

물론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한국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각 나라마다 독특한 방식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급격한 자본주의화, 권력집중, 투기자본의 일상화 등은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의 세계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그 동안 억눌려왔던 다양한 목소리가 ‘아메리칸 드림’의 기만적 속성을 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적 격차와 계층간 차별이 심화·확장됨으로써 ‘아메리칸 드림’은 더 이상 실현될 수 없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러한 정황이 ‘한국의 꿈’에도 해당된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지난날의 ‘꿈’ 혹은 사회적 약속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의 ‘약속’이 등장하여 예전의 약속을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행복의 약속’이 그것인데, 소위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으로 대표되는 성공의 기술에 대한 저작들과 이런 저작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자기계발의 논리를 필두로, 웰빙, 힐링, 치유, 명상, 다이어트, 긍정의 심리학, 전원주택,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등 무수히 많은 행복에 관한 담론들의 대유행이 바로 그 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로렌 벌랜트(Lauren Berlant)나 사라 아메드(Sara Ahmed)와 같은 학자들이 날카롭게 지적하듯이, 이런 행복 담론들은 복지, 정의, 평등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들을 개인의 능력과 가치를 통해 해결하려는 신자유주의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컨대 갈수록 심각해지는 빈부격차는 본질적으로 적게는 국내의 경제·사회 구조에, 크게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 기인한 구조적인 문제로 해결이 요원한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눈 여겨 살펴보아야 할 것은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실망과 분노를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통한 성공’이라는 거짓 약속으로 전치함으로써 실상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치(轉置)는 우리 속담의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것을 의미한다. 전치의 논리는 언뜻 보아 다소 비논리적이고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그리고 알면서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전치는 가장 효과적인 정치적 수단이기도 하다. 모두에게 중요한 A라는 문제에 집중하는 것 대신, 선전, 과정, 광고, 허위를 통해 B에 집중하게 만드는 일은 선거 때마다 벌어져왔다는 것을 국민의 대다수는 알고 있다.

문제는 지금 유행하는 ‘행복의 약속’이 슬픔이나 고난을 창조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예술가적인 ‘좋은’ 전치가 아니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숱한 문제들을 ‘마치’ 없는 것처럼 숨기는 ‘나쁜’ 전치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이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치’라는 의도적, 비의도적 현상에 대한 면밀한 인식과 적절한 대응이 요구된다. 그런데 전치라는 정치적 논리 혹은 전략을 논할 때, 대응의 난점은 우리가 전치의 심각성을 인식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거나’, 강자에게 당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약자에게 분풀이를 하는 경우는 그 사람에게 최소한의 자존심을 회복하고자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행복의 약속’이 환영받는 이유는 지금의 사회와 시대가 힘들고 고단한 삶을 강요하기 때문이며, 이런 상황에서 ‘욜로’를 외치며 현재의 삶을 즐기려는 젊은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엄격한 도덕적인 판단과 행위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주장하는 당사자를 ‘고상하게’ 비치게 하지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역사적 모순을 엄정하게 직시하면서 분석하여 대안을 모색하려는 노력과 사회적 합의를 통한 적절한 대안 제시다. 물론 ‘내’가 행복하기 위한 대안이 아니라 ‘함께’ 행복하기 위한 대안, 공동체적 함의를 담고 있는 대안이어야 한다. 

모두가 동의하듯이, 대안 모색의 출발점은 자신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말하고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고 소통하려는 데서 비롯되어야 한다. 서로의 아픔을 공감한 이후에 생겨나는 것이 대안이며, 이것이 또한 혐오와 배제의 ‘악순환’의 고리를 단절하는 삶을 구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강의혁(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교수)

출처 : 광주드림(http://www.gjdream.com)

기사내용 원문보기: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609639
이전글
당신에게 가족 정의란?…“함께하는 시간”
다음글
무등도서관, 관·학협력 인문학 강좌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