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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드림]팬데믹 시대의 ‘관계’에 관한 단상(斷想)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46
등록일
2020-12-1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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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_4]
언택트 시대, 새로운 컨택트 사유하기



무료이미지 
 

코로나19(COVID-19)가 가져다준 일상의 변화는 이제 ‘뉴노멀(New Normal)’이라는 말로 선언되기에 이르렀다. 사람과 사람 간의 가까운 거리가 치사율과 비례가 된 이 시대에 ‘관계’라는 말의 의미는 재정의를 요구하고 있다. ‘가까움’은 단순히 물리적인 멀고 가까움의 정도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간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말이다.
‘뉴노멀’ 하에서는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접촉이 일상적 삶의 ‘표준’이 되고, 앞으로는 이를 기반으로 삼아 의료를 비롯한 국가 행정 시스템이 전보다 신속하고 효율 높은 시스템으로 구축될 것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대면 접촉의 빈도가 낮아지는 데에 따라, 그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기대하는 것과 다르게, 비대면 접촉을 통한 관계 맺음은 그 한계가 분명하다. 그것은 쉽게 말해 ‘몸’을 매개로, 또 ‘몸’을 위한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시각 위주의 경험)으로 수렴되지도 않고, (가상현실과 같은 기술 발전을 십분 인정한다고 해도) 또한 ‘뇌’로 수렴되지도 않는다. 호모 사피엔스가 최소 2만 년은 넘는 긴 시간 동안 구축되고 자연 선택된 진화의 산물인 ‘몸’과 그것을 통한 ‘느낌’의 삶의 방식은, 우리가 몸을 버리고 (‘인간’이 아닌)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지 않는 이상 결코 가상현실 등 기술 문명이 제공하는 삶으로 대체될 수 없다. 
물론 우리가 계속 인간으로, 즉 현재의 몸을 세계와의 소통 형식으로 삼는 ‘인간’으로 남아 있을 필요와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포스트휴머니즘에 영향을 받은 담론 한편에서는 ‘초인(super-man)’의 이미지뢾이것은 돌연변이(mutant)와는 맥락이 다르다뢿를 통해 장밋빛 미래를 그리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훗날에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른바 ‘선택’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의 폭주를 막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미래를 맞게 된다면, 이 ‘선택’이라는 것조차 자본의 논리에 의해 누군가에게는(아마 대다수겠지만) ‘선택’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접촉이 차단된 관계의 요원함

아무튼 그렇게 도래할 이 유토피아(혹은 디스토피아)적인 세계에서 ‘진화’라는 이름으로 순수 데이터적 존재가 됨으로써 온전히 기술 문명이 만들어낸 세계의 ‘삶’을 살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존재는 ‘인간’이 아닌(혹은 인간을 넘어선) 완전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이에 관해서는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어쩌면 ‘인간’으로 남아 있는 자들에게 ‘그들’에 관해 말할 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과 같은 몸의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에 변화는 없다. 일상적인 예를 들자면, 아무리 온라인 친구가 많고 그들이 친근하다 해도 당장 내가 아플 때 그들은 내게 따뜻한 죽 한 그릇 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한 달을 온라인으로 소통한다 해도, 한 번 손을 잡고 같은 식탁에서 대화하며 함께 식사를 한 사람보다 결코 낫다고 말하지 못한다. ‘식구(食口)’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이 말이 그저 함께 밥을 먹는다고 그 어떤 방식의 관계일지라도 유지될 것이라는 보증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접촉이 (자의든 타의든) 차단된 상황에서 ‘관계’의 심화는 요원해지리라는 것도 쉽게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한 ‘일상’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예전처럼 원활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결국 그와 같은 대면 접촉이 지닌 가치가 그 희소성에 의해 지금보다 훨씬 중요해지며, 또한 그만큼 신뢰를 요구하는 일이 됨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자면 지금 이 상황만큼 ‘인간’에게 저주받은 상황도 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저 포기하거나 신자유주의 기술 문명이 제안하는 대로 쉽게 온라인으로 관심사를 돌리는 것도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일이다. 또한 온라인이 ‘진보’이며 오프라인이 ‘보수’라는 프레임 역시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인간’은 하나의 형식이지 그 자체로 진보와 보수의 가치로 판단될 수 없다.

대면접촉 희소, 극단적 폐쇄로 치달을 수도

아울러 전염력 높은 이 질병의 발생은 기후변화라는 이슈와 맞닿아 있는데, 이에 따라 미래의 도시는 소규모 모듈들의 프랙털 구조로 재편될 것이다. 일부는 그렇게 우려할만한 일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바이러스가 영구동토층이 해빙에 의해 재활성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서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집과 직장, 휴양 공간 등이 집적된 모듈들이 모여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그러한 도시들이 온·오프라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양상으로 바뀔 것이다.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게 되는 이 미래의 도시에서, 공동체가 갖는 위상은 더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이러한 도시의 기반은 민주화된 에너지원, 다시 말해 화석 에너지와는 달리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재생 에너지원이다. 재생 에너지원 확보의 성공에 토대를 둔 이 미래 도시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지역사회의 소통이 큰 문제로 떠오를 것이다. 
즉, 이 도시의 성패를 가르는 또 하나의 축은 바로 이러한 소통을 어떻게 할 것인지의 문제가 된다. 대면 접촉이 지닌 가치가 높아지고 소규모 공동체의 중요성이 점차 커짐에 따라, 개인의 기대 심리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소통은 갈등과 폭력의 소지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희소성을 갖게 된 대면 접촉이 소규모 공동체의 중요성과 결합하여 극단적인 폐쇄성을 띨 수도 있다. 이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도시는 결코 그러한 폐쇄적 공동체들로 운영되지 못한다. 그러한 다공성(多孔性)의 도시에서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삶들을 어떻게 공존시킬 것인가. 이에 관한 고찰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지금-여기’의 삶이다. 이러한 삶은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김청우(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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