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컨텐츠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전체메뉴보기

전체메뉴보기

전체메뉴닫기
소식

언론에 비친 사업단

  • 홈
  • 소식
  • 언론에 비친 사업단
  •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구글 플러스 공유하기
  • 카카오 스토리 공유하기

[광주드림]두터운 관계 소홀한 공동체에 미래 없다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320
등록일
2023-09-05 09:58
SNS 공유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구글 플러스 공유하기 카카오 스토리 공유하기

[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

아비샤이 마갈릿(2023), ‘기억의 윤리’, 박의연·오창환·추주희 옮김, 한국문화사  
아비샤이 마갈릿(2023), ‘기억의 윤리’, 박의연·오창환·추주희 옮김, 한국문화사

지난해 `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을 연재한 전남대 인문학연구원 HK+ 가족커뮤니티 사업단 교수진이 올해 다시 칼럼을 이어갑니다. 본란은 넓은 범위에서 가족과 커뮤니티에 대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성찰을 시도합니다. 사업단은 `초개인화 시대, 통합과 소통을 위한 가족커뮤니티인문학’이라는 주제 아래 인문학적 성찰과 상상을 바탕으로 열린 가족, 신뢰와 조화의 공동체 문화를 연구·확산하는 데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지난해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명단을 공개하는 것을 둘러싸고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있었다. 이후 159명의 희생자 명단이 발표되자 이를 둘러싸고 정치적 공세와 논란이 가중되었다. 보수 언론들은 10·29 참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기억을 지우려 했고, 유가족은 책임자 처벌과 진상조사를 요구하면서 10·29 참사가 망각되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사회의 여론은 정부가 마련한 합동분양소에서 영정도 이름도 없이 참사의 구체적인 얼굴을 지우고 추모해야 하는지, 유가족들의 슬픔에 공감하되 희생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이 죽음을 정치화하지 않아야 하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이러한 한국의 상황과 달리 외신은 일부 희생자들의 얼굴과 이름, 생전의 모습들을 보도하면서 이들의 삶을 드러내고 기억하면서 추모했다. 지난해 참사 직후 한국 정부와 일부 여론은 어째서 그토록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게 했을까?

 저명한 유대인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기억의 윤리’(2023, 한국문화사)에서 사고로 죽은 병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군 지휘관을 향한 대중의 분노와 비난을 통해 이름을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것일까? 이름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과 연관된 사건을 떠올릴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이름일까?

  죽은 병사 이름 기억 못하는 지휘관 향한 분노

 마갈릿은 지휘관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의 핵심을 그가 젊은 병사를 돌보지 않았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병사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가 당시 그 병사를 돌보지 않았다는 암시라는 것이다. 병사와 지휘관은 적어도 충성으로 맺어진 아주 두터운 관계에 있으며, 오인사격에 의한 사망이라는 공유된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사람들은 그 군부대 지휘관이 자기 병사를 도구적으로 다루지 않으며, 병사를 지키고 돌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끼고 돌본다면, 그 이름을 망각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돌봄의 징표인 것이다.

 마갈릿이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는 데는 분명 자기 삶의 맥락이 있다. 그는 2차 대전 시기에 자신이 속한 유럽 유대인 공동체에게 일어난 대량학살을 기억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증언하고 기록해야 할 다음 세대 유대인에 속한다. 마갈릿은 이러한 기억을 지닌 유대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기억이 윤리적 의무라면 그것은 추상적인 차원에서 성립하는 전 인류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인 윤리적 공동체의 의무라는 답을 끌어낸다.

 그의 이야기는 사회적 참사와 재난, 국가 폭력, 역사 왜곡 앞에서 집단적 기억의 힘이 무력화되고 있는 지금 한국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하는가?

 마갈릿은 얕은 관계와 두터운 관계를 구별한다.

 기억과 돌봄은 두터운 관계에서 성립한다. 두터운 관계는 부모, 친구, 연인, 지인 등과 같이 친밀관계에 기초하며, 지난 시간을 함께하거나 같이 간직한 추억과 공통된 경험을 가진다. 마갈릿은 두터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기억의 윤리의 주체임을 강조한다. 장교와 병사처럼,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마음을 쓴다는 의미에서 두터운 관계는 직접적인 돌봄 관계이다. 이러한 돌봄은 의미 있는 타인의 안위와 안녕에 대한 실질적 감정이자 태도라는 점에서 기억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우리사회, 두터운 관계의 기억·윤리조차 박탈·억압”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들만의 안녕만을 바란다는 점에서 기억의 윤리는 매우 협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작은 단위로부터 우리의 유대와 결속력은 점차 확장되어 지역사회와 민족과 국가적 단위까지 그 범위가 미친다. 이로써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문화를 공유한 두터운 관계를 이룬 사람들과 공동체들은 서로 더욱 강력하게 돌보고 기억할 의무를 가지게 된다. 물론 도덕적 공동체로서 전 인류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노예제, 대량학살, 반인류적 범죄 등-도 있지만, 실제로 전 인류가 윤리적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윤리적 공동체의 기여가 필수적이다. 두터운 관계에서 기억의 윤리가 선행하지 않는 한 전지구적인 윤리적 공동체 역시 요원하다.

 세월호 참사와 10·29 참사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안타깝게도 두터운 관계의 기억과 그 윤리조차 박탈하고 억압하는 추세이다. 삶의 기억을 공유하는 두터운 관계의 사람들과 집단의 소중한 기억을 지워 없애거나 통제할수록 그 공동체에 미래는 없다. 우리는 사회적 참사와 국가폭력에 대한 트라우마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며 시민이자 이웃으로서 두터운 관계에 있다. 사회적 참사를 추상화하거나 익명화하지 않고 구체적인 역사적 비극에 대해 개개인들의 삶에 닿을 수 있는 기억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것은 두터운 관계의 결속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곧 10월이 다가온다. 윤리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더없이 필요한 때이다.

 추주희(전남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기사내용 원문보기: https://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632934

이전글
제3의 장소를 찾아라!
다음글
영화·문학으로 만나는 ‘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