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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드림]‘법치’ 너머 ‘인문’ 주체로서 삶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547
등록일
2022-11-0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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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도덕과 법의 경계에서
'문화시민' 돼야 강압·폭력의 역사 탈피


픽사베이 이미지.
                           픽사베이 이미지.


법치인가, 인치(人治)인가?

 엄정한 법치를 보편적인 관계의 기준으로 여기는 오늘날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는 물음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상호 의존적, 상호 호혜적 ‘사람다움’의 관계가 황폐화되어 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법치’만을 외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일까?

 이제 ‘논어’와 ‘한비자’에 나오는 간단한 일화를 통해 오늘날 우리 삶을 장악하는 법치의 이념과 논리에 깊게 파인 골을 들여 다 보자.

 고대 중국의 주요 사상인 유가와 법가는 법을 어떻게 해석하여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운다. 유가는 판관이 제정된 법조문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도덕적 가치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판결하도록 자유재량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논어’의 한 구절은 엄정한 법치를 외치는 법가와 대비하여 살펴볼 때, 도덕과 법을 가르는 준거에 대한 논쟁의 여지를 제시한다. 

공자가 노나라의 판관을 맡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의 불효자식을 고발한 일이 있었다. 공자는 그의 아들을 구류(拘留)한 채 석 달 동안이나 심문하지 않았다.

얼마 뒤 아버지가 고소를 취하하자 비로소 아들을 풀어주었다. 노나라의 계손씨(季孫氏)가 이 말을 듣고 “한때는 효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지금은 한 명의 불효자를 처벌하여 나라 안의 모든 불효자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는데도 오히려 풀어주었다”고 공자를 비난했다.

법치인가, 인치(人治)인가?

 우리는 공자의 행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계손씨의 비난에 담겨 있는 의미를 무엇일까? 공자는 왜 불효한 자식을 심문도 하지 않고 판결하지 않았을까?

 공자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인간의 자의적 판단과 행동으로 결단할 수 없는 ‘천륜(天倫)’으로, 법의 예외상태로 파악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불효를 용서하고 고소를 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 아들도 자율적인 자기 반성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유예기간을 둔 것이다.

 도덕적 질서를 앞세우는 유가는 형벌보다 자율적 교화를 중시하는 도덕적 다스림을 강조한다.

 반면 형벌의 사회통제 기능과 범죄방지 효율성에 초점을 둔 법가는 엄중한 처벌을 외친다. 가벼운 죄에도 무거운 형벌로 ‘일벌백계(一罰百戒)’함으로써 대중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강압적인 공포의 정치를 각인시키는 것이다.

 ‘논어’‘자로’편에는 전통적인 도덕철학적 사유의 역사에서 항상 논쟁이 되어온 구절이 있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무리 가운데 아주 곧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아들인 그가 (그 사실을) 입증하여 유죄가 되었습니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우리 무리 가운데 곧은 자는 당신이 말한 곧은 자와는 다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줍니다. 곧음이란 그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가적 합리주의와 서양 합리주의의 윤리적 사유의 결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유가와 법가의 가치인식의 차이가 명징(明澄)하게 드러난다.

 아버지가 양을 훔치는 절도죄를 저지른 동일한 문제에 대한 가치 갈등 상황에서 공자는 아버지를 숨겨주는 것을, 섭공은 아버지의 죄를 입증하는 증인이 되어 관에 고발하는 것을 정직함으로 판단했다.

 섭공은 법치의 관점에서 법의 충실한 준수 여부에 따라 정직함을 판단하고, 공자는 가족 사이의 본래적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질서(禮)를 지킨다는 관점에서 아들의 숨겨주는 행위를 정직함으로 판단했다.

 이렇게 동일한 상황에서 다른 행위, 다른 가치판단이 도출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법치의 관점에서 공자의 주장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공자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법의 토대와 사회의 질서체계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공자를 대신하여 변호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의 관점은 사회정의라는 객관적 규범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적 도덕 감정에 바탕을 두고 곧음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공의 이익과 사사로운 감정

 섭공의 관점을 옹호하는 한비자는 다소 다른 시각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초나라에 궁이라는 정직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니 그것을 관가에 고발했다. 재상이 ‘죽이라’고 말했다. 군주에게는 정직하지만 자기 아버지에게는 정직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벌을 주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군주의 정직한 신하는 아버지의 포악한 자식이다. 노나라 사람이 군주를 따라 전쟁에 나가 세 번 싸움에 세 번 도망쳤다. 공자가 그 까닭을 추궁하였더니 ‘저에게는 연로하신 아버지가 있습니다. 제가 죽으면 봉양할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효자라고 생각해서 천거하여 계급을 올려주었다. 이로 미뤄보면 아버지의 효자는 군주의 역신(逆臣)이다. 그러므로 재상이 아버지를 고발한 아들을 죽인 뒤로 초나라에서는 다시 간악한 자를 고발하는 일이 없어졌고, 공자가 상으로 탈영범의 계급을 올려준 뒤로 노나라의 백성은 항복하고 달아나는 것을 예사로 여겼다. 위아래의 이익은 이처럼 다르다. 군주가 어중이떠중이의 행실 하나하나를 들어 모두 이유가 있다고 받아들이면서 나라의 복리를 이루고자 한다면 반드시 되지 않을 것이다.”

 한비는 부자관계라는 사적 영역과 공동체 질서라는 공적 영역을 철저하게 구별하면서,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인 행위가 공동체 질서의 틀을 무너뜨린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며 그 삶의 방식도 제도와 체계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두 일화 속의 탈영행위와 고발하지 않은 행위는 공동체(국가)의 관점에서 용인할 수 없는 범죄행위로 간주한다. 아버지의 범법 사실을 고발한 자식을 불효자로 낙인찍어 매도한다면 범죄를 저질러도 범죄행위의 발각 가능성도 법집행의 실효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범법행위를 막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탈영한 병사를 효자로 포상한다면 그 나라는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한비의 관점에서, 공자가 사람다움의 표상으로 치켜세우는 효는 사사로운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공공의 이익과 사사로운 감정이 부딪칠 때 공익을 옹호하는 행위는 당연하다.

 반대로 공자의 생각 밑바탕에는 인간은 본래 도덕 실천의 가능성을 지닌 자율적 존재이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천륜으로 맺어진 부자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공자의 주장은 “대중을 정치로 인도하고 형벌로 다스리면, 대중은 형벌을 면하고도 부끄러워함이 없다. 그러나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할 줄 알고 또한 잘못을 바로잡게 된다”고 강조한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공자는 대중이 인문적 소양과 자율적 반성과 교화를 통해 행위의 동기를 도덕적으로 가다듬지 않는 한, 법의 체계적 확립과 법집행의 엄정성만으로는 넘쳐흐르는 범죄행위를 막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유가적 관점에서 형벌이란 범죄 발생 이후에 공공성이라는 이름으로 집행되는 일종의 보복적 행위이므로, 인간의 행위를 원인으로부터 치유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따라서 어떤 행위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상으로 구체화되기에 앞서 인문정신·인문문화의 토대를 바로 세워 스스로 상호 호혜적, 상호 의존적 도덕적 삶을 정초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이 법과 제도에 귀속되지 않도록”

 덕치·예치를 주장한 유가와 엄격한 법치를 강조한 법가의 상반된 인식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아비샤이 마갈릿(Avishai Margalit)은 ‘품위 있는 사회(The Decent Society)’에서 “인간이 인간을 모욕하지 않고 제도가 인간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품위 있는 사회’로 명명한다.

 마갈릿은 “정의로운 사회는 모두 품위 있는 사회여야 하지만 그 역(逆)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 바람직한 사회는 꼭 정의롭지는 않더라도 반드시 적어도 그 제도가 ‘모욕 금지’라는 규범적 원칙을 실현한 품위 있는 사회이기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욕은 “어떤 사람을 사람이 아닌 것처럼 대하거나 그에게서 기본적인 통제력을 빼앗거나 또는 그를 ‘인간의 가족’으로부터 배제하려는 행위나 조건”이다.

 ‘엄정한’을 외치는 법가의 법치와 ‘사회정의’를 구호삼아 법 만능주의를 외치는 우리 사회의 법치가 제도가 인간을 모욕하지 않는 품위 있는 사회를 실현하는 데 근본방안이 될 수 있을까?

 공자가 제시하는 덕치나 예치가 지금 이 시대의 삶을 실현하는 유일한 대안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사유의 심연에 뿌리내린 인문주의에서 우리 삶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대중사회에서 우리가 힘든 것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가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관계를 맺어주며 서로 분리시키는 힘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것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러기에 ‘엄정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법치’가 사람들 사이를 분리시켜 가르는 원심력으로 작용할 수 없도록, 인간이 법과 제도에 귀속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인문시민, 문화시민이어야 한다. 법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강압과 폭력의 역사, 수탈의 역사가 “피로 얼룩지고 불길에 타오르는 문자로 인류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복동(전남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기사내용 원문보기: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619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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