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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드림]이종간 또는 동종간 함께 살기 조건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713
등록일
2022-07-2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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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
공감(共感)을 통해 공서(共棲)하기

Image by fernando zhiminaicela from Pixabay.Image by fernando zhiminaicela from Pixabay.


코로나19로 대표되는 전염병에 의한 전지구적 위기는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성취와 발전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인류는 전염병의 위험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학적 능력을 발휘하여 위기에 대응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은 전과 같아질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특히 언택트로 지칭되는 비대면 생활 방식은 대면 생활이 가지고 있던 평범함 등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었는지 역설적으로 깨닫게 했다. 

하지만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이 비단 오늘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 재난과 위기는 항존했고, 전통시대에는 전쟁, 전염병, 대기근과 같은 것으로 등장했다. 전쟁의 경우만 하더라도 ‘임병양란(壬丙兩亂)’으로 대표되는 이민족의 침략이나 한국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통에서 현대에 걸쳐 다수의 경험이 있었다.

이때 국민의 안전 보장이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국가였다. 하지만 수많은 문헌기록을 통해 확인되듯 국가에 위기가 발생하면 공권력은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정작 국가는 공동체의 위기 앞에서 공동체의 안위를 보장하지 못하고 무기력함만 드러내곤 했다. 오히려 의병과 같은 개인과 가문 등 지역 공동체 단위의 항전이 두드러졌고, 개인과 가문 중심 지역 공동체의 행동이 국가의 위기 속에서 존재감을 명징하게 발현해냈다. 

‘이득도 해도 없는 공생 관계’

따라서 재난과 위기 상황에서 발현되는 개인과 공동체의 행동은 사회의 위기 극복 역량 능력을 가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팬데믹[Pandemic] 시대에 비대면으로 상징되는 개인이 코로나 블루[Corona Blue]로 명명되는 고독에 노출되며 소통 부재로 빠져들때 공동체는 공동체 의식을 꺼내 들어 대응함으로써 공동체성의 의미와 가치를 증명한다. 하지만 공동체성이 강조될수록 개인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이며, 그 안에서 여성,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은 더욱 불평등에 노출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도 한다. 전통시대의 경우 그 심각성은 훨씬 더 컸을 것인데, 계급으로 점철된 불평등한 사회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를 인정받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이기도 했기에 이에 대해 한걸음 들어갈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공존, 공생 등 공동체성을 둘러싼 다양한 개념 가운데 ‘공서’라는 개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서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종의 두 생물이 서로를 의지하며 그 생활을 경영하는 것”, “두 종의 서로 다른 생물이 일정한 관계로 함께 생활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뿐만 아니라 ‘Commensalism’으로 번역되어, ‘장기간에 걸친 생물학적 상호작용으로 한 종의 구성원들이 이득을 보는 반면 이 상호작용에 관계하는 다른 종들의 구성원들은 이득을 얻지도 않지만 해도 당하지 않는 공생 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본다면 공서의 핵심은 ‘다른 종이 함께 사는 것’에 있는데, 이럴 경우 우리는 먼저 반려동물과 같은 이종(異種)과 함께 같은 공간에 사는 것을 손쉽게 떠올리게 된다. 이는 한자 가운데 ‘家(집 가)’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기도 한데, (집 면)과 豕(돼지 시)로 구성된 家는 집안에 돼지가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아래층에는 돼지가 위층에는 사람이 살던 옛날의 가옥 구조를 반영한 것에 해당된다. 즉, 사람과 가축이라는 이종의 공동 주거는 실제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인류의 문명 발전과 함께 이종의 공동 주거에서 분리 주거의 형태로 변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핵심은 이종이 공동 공간에서 같이 생활했다는 것이다.

이종과의 공동생활에 대한 기록은 전통시대 문헌 속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특히 ‘충직한 개 이야기’로 잘 알려진 동물 관련 일화를 통해 이종과의 공서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전통시대 문헌 기록에 남겨진 동물 관련 일화는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지배계급의 호혜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시선이 강하게 투사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물을 비롯한 여성, 장애인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이른바 남성 사대부로 지칭되는 지배계급의 시선으로 사회적 존재를 구획당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그들 역시 공동체의 일원이자 공서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타적 실천으로 공서 대상 존재 인정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공서의 대상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지배계급에게 요구되는 희생과 헌신 등 윤리성의 체화와 실천을 역설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이다. 즉, 전통시대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록은 지배계급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소환된 것이긴 했으나, 오히려 지배계급보다 더 이타적 행위의 실천을 통해 공서의 대상이자 주체로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문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이타적 주체가 되기를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파편화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혼자를 즐기면서도 때로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을 잊고픈 욕망을 반려동물이라는 이종을 공서의 대상으로 삼아 함께 사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는 건 아닐까? 이 또한 동물이라는 이종을 인간이 우위인 입장에서 공서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시선이 투사된 것으로, 반려라는 단어를 통해 애써 위계적 태도를 은폐하려 드는 건 아닌지 적잖이 염려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종의 관계에서 진정한 공서는 가능할지, 또는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공서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등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게 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은 내리기 어렵다. 다만 끝까지 부여잡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태도이다. 내가 겪은 고통은 나만이 알 뿐,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 유사한 감정을 느끼기란 참으로 어렵다. 다만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의 경우 내가 겪은 고통이 얼마나 처참한지 대략이나마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우리는 동종과 이종의 관계 속에서 희노애락을 경험하고 공유한다. 공유하는 감정이 심화될수록 공서의 대상에 대한 이해는 확장될 것이다. 이해가 공감을 얻게 되면 공서한다는 것이 새로운 힘을 받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전과는 다른 터전으로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그 길은 지금 우리가 공서의 대상들과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의숭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교수)


기사내용 원문보기: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616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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