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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드림]조상의 무덤·비석은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018
등록일
2021-12-2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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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 (17)
초연결성 시대 추모 의미와 양태

과거 묘역의 조성과 묘비를 건립하는 것이 사회적 네트워크 내에서 가문의 지위와 위상을 설명해주는 권력적 표상이었다면, 이제는 죽음을 추모하는 가족 내 사적 의례의 공간으로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광주시립묘지 전경. 광주드림 자료사진
과거 묘역의 조성과 묘비를 건립하는 것이 사회적 네트워크 내에서 가문의 지위와 위상을 설명해주는 권력적 표상이었다면, 이제는 죽음을 추모하는 가족 내 사적 의례의 공간으로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광주시립묘지 전경. 광주드림 자료사진

[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 (17) 초연결성 시대 추모 의미와 양태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묻고 그의 행적과 공덕을 기리거나 추모하는 내용을 묘비에 새겨서 세운다. 이러한 매장 문화는 고려후기 ‘주자가례’가 보급되어 화장을 금지하면서 민간에까지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 가문의 여러 세대가 같은 묘역에 무덤을 쓰는 문중 묘지도 출현하였다.

문중 묘지의 조성과 피장자의 공적을 기술한 묘비의 건립을 통해 그 후손들은 가족의 결속을 다질 수 있었고, 또 향촌사회 내에서는 우리가문을 타가문과 구별 짓는 가시적 공간으로서 의미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농업사회이며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문중 묘소와 묘비 건립의 의미가 컸으며, 지금까지 그 전통의 힘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누구나, 어디에서나, 언제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된 초연결성(hyper-connectivity)으로 연결된  네트워크 사회(network society)에서 조상의 무덤과 비석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궁금하다.

초연결성의 기원은 생산과 소비의 네트워크를 변화시킨 철도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임스 와트의 기여로 만들어진 증기기관차와 철도는 사람들이 이동하는데 있어서 시공간의 제약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 농업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말이나 배를 타거나 도보로 이동하였다. 

당시 조상의 현양은 양반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조상을 현양하는 첫 번째 작업이라 할 수 있는 묘소 조성과 그곳에 정신을 불어넣는 묘비 건립에는 상당한 공력이 필요했으며 시공간의 제약이 컸다. 그 구체적인 사례는 18세기 고흥 여산송씨 가문의 묘비 건립 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여산송씨는 고흥의 대표적인 양반 가문 중 하나이다. 여산 송씨 후손들은 ‘정유재란’과 ‘정축의 변’ 때에 각각 전사한 송대립·송침 부자를 추숭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송정악은 1744년부터 1750년까지 7년 동안 묘소에 묘비를 건립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묘비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묘비문을 찬술하고 서체(書體)를 얻는 한편 석재를 마련하여 운반한 후 비문을 새기고 세우는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송정악은 한반도 남단 고흥에서부터 서울까지 수차례 이동하며 어렵게 묘비를 건립하였다.

조상 묘비 찬술에 드러난 후손들의 욕망

송정악은 묘비문 찬술을 위해서 1744년 당대 노론 계열의 명사였던 이재(李縡)가 거처하던 경기도 용인으로 찾아가 그 문하에서 수학하며 송대립·송침 등 선조의 가장(家狀)을 올려 그로부터 비문을 받아냈다. 이후 1747년에는 경기·서울 등지를 방문하여 당대의 명필가인 유척기로부터 제액에 사용될 서체를 받고, 비신에 들어갈 서(書)를 여주에 있는 민우수에게 받았다. 1749년에는 석재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서울에 도착하여 4개월 이상을 머무르며 2개의 석재를 구매한 후 배편을 마련하여 고흥으로 운반하였다. 그 후 1750년 비문에 글자를 새기고 묘비를 세웠으며, 묘비의 내용을 인출한 것을 1751년 주변의 지인들에게 배포하였다. 무려 7년에 걸친 노고의 결실이었다. 

조선시대에 묘소에 묘비를 건립하는 것은 정신적, 육체적 수고스러움이 큰일이었다. 송정악은 먼 거리를 직접 이동하여 묘비문 찬술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선현의 문장을 짓는 것은 아직도 지체되어 언제나 지을 지 알 수가 없으니 절박한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다(‘서행록’, 갑자 6월 1일)”고 걱정하였고, 또 서울에서 석재의 구입이 더뎌지자 “아침에 겹겹이 우뚝 솟은 옥 같은 삼각산 보니, 비 온 뒤에 가을 기운이 한껏 드높아 새롭구나. 절기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교체를 서두르는데, 떠도는 객지 생활에서 어찌 못 돌아가는 신세인가(‘서행록’, 기사 7월 6일)”라고 하며 막막하고 마음 졸이며 힘든 객지생활을 한시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묘비를 건립하는데 있어서 석재 비용, 석재 알선비, 우차 및 선가 등 각종 운반비, 역군 및 석수의 품삯, 각종 도구 비용, 자신의 체류비 등을 지출하여 경제적 손실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송정악은 7년이라고 하는 긴 시간 동안 고흥에서 서울·경기지역 대부분을 도보로 이동하며 묘비 건립을 위해서 온 힘을 다하였다.

이렇게 송정악이 묘비 건립에 열성을 다한 것은 단순히 묘비를 건립하여 묘의 주인을 표시하기 위해서라거나 또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명예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사회 상황과 고흥 지역에서 양반으로 존재하기 위한 여산 송씨 가문의 전략도 함축되어 있었다. 

18세기에는 ‘주가가례’ 보급의 확산과 비학(碑學)의 성장으로 묘비를 세우는 풍조가 늘어났으며, 충효열사를 강조하는 국가 시책도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여한 향촌 양반 가문의 경우 대명 의리와 절의를 강조하는 서울 경기지역의 노론 학맥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충절가문’이라고 하는 가문의 정체성과 위상을 향촌사회에서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는 다시 지역사회에서 자기 가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편 양반으로서 지역사회에서의 현실적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송정악의 활동은 단순히 여산송씨 가문의 한 개인의 활동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18세기 후반 당대 향촌 사회에서 생활하였던 양반 후손들의 욕망을 대변한다. 

향촌 양반 후손들의 이와 같은 욕망은 ‘먼 거리’, ‘오랜 시간’ 등을 극복해 내며 묘소에 묘비를 완성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묘소에 묘비를 건립하는 일은 누구나, 어디에서나, 언제나 쉽게 할 수 없는 권력적인 속성의 것이었다.

언택트 시대 추모 의례도 디지털화

신분제가 철폐되고 산업화된 근대 이후 우리는 누구나, 어디에서나, 언제나, 자본만 있다면 쉽게 묘소를 조성하고 묘비를 건립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중의 묘소를 조성하고 족보를 편찬하는 등의 일도 한 때의 일에 불과하였다. 

이제는 자본만 있다면 더욱 발달된 기술로 더 빠르고 더 쉽게 묘소를 조성하고 묘비를 건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족의 중대한 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묘역을 조성하고 묘비를 건립하는 것보다는 납골당에 조상을 안치하고 추모하는 것이 시대의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 묘역의 조성과 묘비를 건립하는 것이 사회적 네트워크 내에서 가문의 지위와 위상을 설명해주는 권력적 표상이었다면, 이제는 죽음을 추모하는 가족 내 사적 의례의 공간으로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더구나 코로나 19로 인해 각종 디지털 기술이 실험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요즘, 온라인 추모나 성묘서비스를 통해 묘소에서의 의례가 실시되고 있는 실상을 보면 묘소와 묘비의 상징적 의미의 축소는 가속화 될 것 같다.

즉 온라인 상에서 추모관 및 차례상 등을 꾸미고 추모의 글을 작성하며 추모하는 음성메시지를 녹음하고 추모하는 영상을 등록하는 등의 일은 시공간을 뛰어넘은 새로운 길로, 이러한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묘소와 묘비의 조성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낙인 찍을지도 모르겠다. 전국 국토 면적에서 묘지 비율이 해마다 줄어드는 것도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가문의 오랜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또 지속적으로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는 일부 가문에서는 여전히 묘역의 조성과 묘비 건립을 지속하고 있다. 

또 그 중요성에 대해서 공감하는 가문들은 풍수지리상 좋은 묘역의 조성과 뛰어난 문장가가 지은 비문의 묘비 건립뿐만 아니라 족보 편찬, 사우 건립, 문집 편찬 등 조상을 현양(顯揚)하기 위한 일들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초연결 시대 조상의 무덤을 조성하고 비석을 세우는 거룩한 작업 또한 이러한 두 가지 방향의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박미선(전남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기사내용 원문보기: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61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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