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컨텐츠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전체메뉴보기

전체메뉴보기

전체메뉴닫기
소식

언론에 비친 사업단

  • 홈
  • 소식
  • 언론에 비친 사업단
  •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구글 플러스 공유하기
  • 카카오 스토리 공유하기

[광주드림]지금-여기 문제를 그대로 두고 미래 행복할 수 있을까?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911
등록일
2021-11-29 09:27
SNS 공유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구글 플러스 공유하기 카카오 스토리 공유하기

[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 (15)과학기술이 가져다 줄 약속의 ‘근미래’

콜슨 화이트헤드의 소설 ‘제1구역’
콜슨 화이트헤드의 소설 ‘제1구역’

[언택트 시대, 새로운 컨택트 사유하기]

이제 ‘미래’라는 말은 더 이상 한 세대, 혹은 50년, 100년 이후의 아득한 시간을 말하지 않는다. 최근 매체에서 혹은 미래 학자들이 말하는 미래는 5년 혹은 10년 이후 정도이다. 때문에 ‘근미래’라는 말도 이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미래가 ‘근미래’를 나타낸다면 이제 우리에게 미래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충분히 예측가능한 미래일 것이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의 재현은 이미 우리 삶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 삶의 모습의 미래-자율주행자동차, 인공지능 등-를 펼쳐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예언 속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현재 예측 가능한 미래와 우리 삶을 어떤 자세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모순들을 그대로 둔 채로, 예측가능한 우리의 미래가 장미빛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흑인 작가로 퓰리처상을 2회나 수상한 콜슨 화이트헤드의 소설 ‘제1구역’에서는 지금 현실의 모순을 그대로 둔 채 미래를 맞이하는 것은 결국 좀비의 역병이 휩쓸어버린 종말 후 세계와 같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를 위해 ‘화이트헤드’는 좀비 팬데믹이 덮친 종말 후 세계의 풍경을 뉴욕으로 상징화시켜 보여준다. 

뉴욕이 어떤 곳인가? 전 세계 신자유주의의 심장이 아니던가! 소설 속에서 재건위원회는 생존자들에게 뉴욕에서 좀비를 몰아냄으로써 새로운 미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선전한다. 그러나 재건위원회에서 정상으로 되돌리겠다고 하는 미국이란 좀비 팬데믹 이전의 미국이며, 청소를 마친(좀비가 제거된) 뉴욕으로 돌아올 생존자들의 대부분은 모두가 짐작하듯이 특권 엘리트 계급들이다. 

‘화이트 헤드’는 뉴욕의 하층민들, 노동자들, 흑인들만이 좀비 팬데믹의 희생자가 된 것을 그리며 좀비라는 존재를 이들과 동일선상에 놓는다.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존재,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존재, 그래서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없는 존재, 그러므로 결국 제거되거나 영원히 격리되어야 하는 존재. 

현실 모순을 그대로 둔 채 미래를 맞이하는 일…

종말 후 세계에서조차 젠트리피케이션이 한창인 뉴욕의 풍경을 배경으로 이어지는 주인공 마크 스피츠의 과거에 대한 회상과 미래에 대한 씁쓸한 예측은, 미국 재건 프로젝트를 선전하는 재건위원회의 위선적인 면과 교차한다. 때문에 생존자였던 마크 스피츠가 살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놀랍게도 좀비의 바다로 걸어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라는 체념의 경험을 함께 하게 된다. 이처럼 화이트헤드는 팬데믹이 덮친 근미래(?)를 통해 현재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들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파올로 바치갈루피의 ‘십 브레이커’
파올로 바치갈루피의 ‘십 브레이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파올로 바치갈루피의 ‘십 브레이커’ 또한 우리의 예측가능한 미래를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과학기술의 진보를 향유할 수 있는 상류층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격차를 ‘현재처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바닷가에 사는 빈민 소년이다. 이 소년이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은 바닷가에 떠밀려 온 폐선박의 내부에 들어가 재활용 가능한 부품들을 선박의 몸체에서 분리하는 일이다. 어둡고 좁은 선박의 내부에 들어가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몸집이 작은 어린 청소년일 뿐이며, 이 바닷가 일터에서도 여전히 지배와 착취의 메커니즘은 그대로 재현된다. (여기서 19세기 초반 영국 시인 블레이크의 ‘굴뚝 청소부’가 연상된다면, 19세기에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몫이 없는 자들의 현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당시 영국의 좁은 굴뚝을 청소하던 노동자들은 만 4~5세 정도의 어린 노동자들이었다.) 바치갈루피는 생계를 위해 무방비상태의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킬수 밖에 없는 신자유주의 노동자를, 청소년으로 설정한다. 위의 좀비와 마찬가지로, 신체적, 사회적으로 취약한 존재, 저임금 노동자로 활용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어른들의 힘의 논리에 따라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존재로. 
소설 속 빈부의 격차에 대한 묘사는 매우 날카롭다. 소설에서 다국적기업 경영을 통해 세계의 부의 대부분을 차지한 1%, 소위 ‘슈퍼크레이지리치’들은 과학기술을 이용해 하늘과 바다를 마음껏 소유할 수 있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오염된 땅일 뿐이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현재의 빈부격차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오히려 더 심화된 채로, 이제 다가올 근미래에 우리의 삶은 어떻게 추락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우려를 읽을 수 있다.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옳은 자세가 가져올 변화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최근작 ‘클라라와 태양’에서는 우리 미래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이전 소설 ‘나를 보내지 마’에서 장기이식용 클론을 통해 우리 사회의 쓰고 버려지는 존재에 대해 윤리적 성찰을 요구하던 이시구로의 통찰은 ‘클라라와 태양’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유전자 편집의 실패로 몸이 아픈 조시가 구입한 AF(인공지능 친구)인 클라라는 조시의 건강 회복을 위해 헌신한다. 세상에!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보여주는 어떤 헌신도 클라라와 같기는 어려울 것이다. 

소설 속 클라라는 현재 우리가 만나는 수동적인 인공지능 로봇이 아니라, 상황 판단과 기억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클라라는 만일의 경우(조시가 죽을 경우) 조시를 이어가야하기 때문에 조시와 똑같이 행동하도록 요구받는다. 다행이 조시는 무사히 성장하지만, 조시가 성인이 되면서 더 이상 쓸모없게 된 클라라는 폐기물 하치장에 버려진다. 사랑과 헌신이 인간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었던 클라라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자기가 흉내낼 수 없는 어떤 특별한 것은 조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다고 말한다. 인공지능의 통찰이라니!

여러 매체에서 선전하듯 우리의 근미래는 과학기술이 가져다 줄 많은 약속과 전망들로 넘쳐난다. 

그러나 지금-여기의 문제들을 그대로 두고 우리가 과연 미래에 행복할 수 있을까? 

대답은 No!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여기의 문제들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비관하지는 말자. 너무 낭만적인 말이지만(낭만적이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자세의 문제이고, 그 옳은 자세가 결국은 작은 변화라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김은영(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기사내용 원문보기: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611552
 
이전글
전남대-조선대 “내년부터 공동 교양과목 운영”
다음글
아버지 양육 참여, 어머니가 문지기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