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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드림][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 (8)우리의 덤덤한 공동체를 위해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401
등록일
2021-05-0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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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택트 시대, 새로운 컨택트 사유하기]
인종주의의 일상화 ‘마이크로어그레션’



픽사베이 이미지.
 
미국의 인구 통계에 의하면 인구의 40%가 백인이 아닌 인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라틴계, 아프리카계, 아시아계, 미국 원주민, 하와이 원주민 등이 포함된다.

이처럼 여러 인종과 문화를 가진 이민자들이 만들어 낸 미국 다문화사회는 멜팅팟, 샐러드볼, 토마토수프 등의 말들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미국 사회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아시아계 미국인, 즉 비(非)백인에 대한 혐오범죄에 대한 논쟁과 반대 시위가 지속되고 있다.

오늘도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건의 선고를 앞두고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에 대비해 미국 주 방위군과 경찰이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는 뉴스가 실렸다.

2020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는 위조지폐 사용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플로이드는 체포 도중 목이 짓눌리는 과잉진압을 당하면서 병원으로 옮겨졌고, 결국 사망했다.

이후 한 행인이 촬영한 영상과 경찰들의 보디캠 영상이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공개되었다. 이 영상들에 따르면 플로이드는 체포 당시 경찰에 크게 저항하지 않았고, 손이 뒤로 묶여 바닥에 엎드린 채 무릎으로 자신의 목을 짓누르는 경찰에게 “숨을 못 쉬겠어”(I can't breathe)라고 반복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플로이드의 영상을 본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기시감을 느꼈다. 2014년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을 촉발시킨 에릭 가너(Eric Garner)의 죽음 당시 상황과 모든 것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후에 블랙 라이브즈 매터의 슬로건이 된 “숨을 못 쉬겠어”라는 호소마저도.

“미묘하지만 모욕적인 일상”

왜 백인들에게 흑인의 몸은 보이지 않거나, 위험한 몸으로 간주되는가?

2014년 미국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클로디아 랭킨(Claudia Rankine)의 ‘시민: 미국의 한 서정시’(Citizen: An American Lyric)는 이 질문에서 시작되는 책이다. 이 질문에 대한 논의를 위해 ‘시민’은 인종주의에서 비롯된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gression)에 대해 다루고 있다.

수(Derrald Wing Sue)에 따르면 ‘인종적 마이크로어그레션’은 1970년대에 정신과 의사였던 체스터 피어스(Chester Pierce)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일어나는, 미묘하지만 모욕적인 일상의 경험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이다.

마이크로어그레션은 순간적으로 매일의 일상에서 무례한 행동과 모욕적인 언어로 발현된다. 이때 가해자의 행동은 고의적일 수도 있지만 무의식적일 수도 있다. 때문에 가해자는 상대방에게 행하는 공격의 의미를 전혀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고, 오히려 선의의 취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자신의 행동을 변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시인 랭킨은 굳이 인종주의가 아닌 마이크로어그레션을 이야기하는가? 랭킨은 ‘시민’에 관한 한 인터뷰에서 마이크로어그레션이라는 용어는 인종주의가 한 인간을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 때, 어떻게 각각 다른 형태로 세분화되어 나타나는가를 보여주기에 유용하다고 말한다.

랭킨이 시집에서 말하는 마이크로어그레션이란 인종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일상에서의 차별이다. micro-라는 말은 차별의 정도가 사소하거나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랭킨은 시집에서 주변인들의 인터뷰를 채집하여 마이크로어그레션의 여러가지 사례들을 제시한다. 시집에서 고발하는 말하는 마이크로어그레션의 경우는 매우 일상적이면서도 반복적이고 다양하다.

예를 들어 마트의 계산대에 줄을 서 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앞으로 한 백인 남성이 차례를 무시하고 자신의 물건을 올려놓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인 당신은 백인 남성의 행동을 실수로 가벼이 넘기려 하지만, 그 백인 남성은 사과는 커녕 “아니, 아니, 아니요. 난 정말 당신을 못 봤어요”라고 말하며 보이지 않음을 강조한다.

그 남성은 정말로 그녀를 못 보았는가? 1952년 랠프 엘리슨(Ralph Ellison)이 ‘보이지 않는 인간’(Invisible Man)에서 말한 것처럼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 누군가가 사회적으로 타자였을 경우는 더욱 더, 보지 않으려고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바라보는 백인의 시선이란 흑인들을 개별적인 한 인간이 아니라 “모든 흑인들은 똑같이 생겼다”라는 인종주의적 전형화라는 프레임 안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비가시성은 배제와 차별로 이어진다. 전화 통화로 계약 의사를 밝힌 남성의 사무실에 계약서를 가지고 도착했을 때 ”당신이 흑인인 줄 몰랐잖아요!”라고 소리치며 계약을 무산시키거나, 학문적 성취로 알려진 한 백인 여성이 “나는 흑인 여성도 암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은 몰랐어요”라고 말하거나, 비행기 창가 좌석에 앉아있는 흑인 여성을 보고 나중에 탑승한 옆 좌석의 모녀 중 딸이 큰 소리로 “여기가 우리 자리 맞는데, 이건 내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야”라고 소리치는 장면 등은 성별, 나이, 계층을 막론하고 미국 사회에서 전방위적으로 가해지는 마이크로어그레션의 상황을 보여준다.

다문화라는 말을 없애면 어떨까?

마이크로어그레션은 미국의 백인과 미국의 흑인 사이의 이야기일 뿐일까?

몇 년 전 한 백인 외국인 친구가 한국의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가정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한국인의 결혼율과 출산율은 낮아지는데, 결혼이주여성이 낳은 아이들이 한국인들이 낳은 아이들보다 많아지면 어떻게 하겠냐고. 그 친구는 “지금 순수한 한국인의 피가 오염되고 있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야말로 순혈주의적, 인종주의적 발언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처음 듣는 말이 아니라, 주변에서 여러 번 들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이미 다문화사회로 진입했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극단적으로, 역지사지의 자세를 가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지금 미국 사회에서 일어난 아시아계를 향한 혐오 범죄를 봐라. 우리도 미국에 가면 마찬가지로 차별받는 피부가 노란색인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백인이 아닌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의 시선을 거두라고.

역지사지의 자세를 발휘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진 나라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을 쓰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결혼이주여성, 외국인노동자도 마찬가지다.

한국인들끼리 이룬 가정을 한국인가정이라고 쓰거나 한문화가정이라고 쓰지 않듯이, 그들을 규정짓는 어떤 프레임없이 그냥 그들을 그들의 이름만으로 호명할 수는 없을까?

그냥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마트에서, 공원에서, 거리에서 늘 스치며 지나가는 그냥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프레임을 갖다 대는 순간 이미 마이크로어그레션, 배제, 차별이 시동을 걸고 가속 페달을 밟는다. 부족한 노동력과 인구 절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많이 받아들이든지, 이민자의 유입을 확대하든지, 외국 유학생 수를 늘리든지 그것은 정책을 결정하는 이들이 할 일이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우리 공동체가 허약해지지 않고 짱짱해지도록, 다양한 색깔의 실과 다양한 질감의 패브릭들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퀼트를 만들 수 있도록, 덤덤하게 서로 마주치고 교차하고 합쳐지는 일에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김은영<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출처 : 광주드림(http://www.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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