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컨텐츠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전체메뉴보기

전체메뉴보기

전체메뉴닫기
소식

언론에 비친 사업단

  • 홈
  • 소식
  • 언론에 비친 사업단
  •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구글 플러스 공유하기
  • 카카오 스토리 공유하기

[광주드림]‘빗장공동체’에서 ‘트임 공동체’로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353
등록일
2021-04-12 15:17
SNS 공유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구글 플러스 공유하기 카카오 스토리 공유하기

[언택트 시대, 새로운 컨택트 사유하기]
철저하게 공간 사유화…외부 소통 차단



 



“대중사회에서 우리가 힘든 것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사람들 수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가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관계를 맺어주며 서로 분리시키는 힘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공동세계에 대한 관심의 결여, 공동세계와의 결속감과 연대의식의 상실이 공동체의 해체, 사이 관계의 갈등과 균열을 초래했다고 진단한다. 사회적 위상과 경제적 계층에 따라 분할된 현대 사회의 도시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는 중세의 도시를 에워싼 벽이 그 도시를 고립된 섬처럼 보이게 한다고 말하면서, 해 질 무렵 문이 닫히고 세상의 안식처를 봉쇄할 때 일체감, 안전감을 만들어내는 벽의 심리적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멈포드의 말을 인용하여 ‘빗장 공동체’(gated community)라 이름 붙인 현대 도시의 모습을 ‘고립된 섬들의 군집(群集)’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슬럼’ 경계선 상 장벽

빗장공동체의 기원은 인간이 오래된 건물을 건축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거주자와 그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군대의 지휘소나 제국의 수도가 아닌 도시에 사는시민들은 최소한의 벽과 돌로 방대한 지역을 둘러쌓았다. 벽은 도둑이나 파괴를 막는 데 사용되었으며, 평화로운 시기에는 입구와 출구. 통제하는 기능을 했다.
고대의 도시가 주거공간과 군사기지로 두루 쓰이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빗장공동체는 철저하게 공간을 사유화하여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하는 고립된 영역이다. 
일반적으로 빗장공동체는 벽과 울타리, 덤불과 관목으로 덮인 둑으로 가리어진 주거단지를 가리킨다. 어떤 경우는 자연보호구역과 같은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보호되기도 한다. 
빗장공동체는 도시 근교의 고급주택단지나 콘도미니엄, 조합식 공동아파트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 찾을 수 있는 문을 지키는 사람이 상주하는 공동주택과 다르다. 이는 거주하는 집에 대한 접근뿐만 아니라 역내(enclosure)에 있는 공유지와 공공서비스―길, 공원, 편의시설, 개방된 공간―의 사용도 제한한다. 
건설 환경의 측면에서 벽과 문은 사회·심리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물리적 차원에서 효능을 지닌 가시적 장애물이다. 현대 도시에서 빗장공동체의 안과 밖을 가르는 문과 벽은 도시인의 실존적 교류와 소통을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 
최근 빗장공동체의 유행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점차 심화되고 있는 사회·정치·경제적 불평등을 주요요인으로 꼽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해 깊게 파인 불평등 구조의 골은 도시의 생태계의 빗장공동체 확산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짙게 드리워진 도시의 그림자, 슬럼을 떠올리게 한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시각에서 슬럼의 가장 큰 특징은 비도덕적이라는 점이었다. 2003년 10월 UN-HABITAT에서 출판한 획기적이고도 암담한 보고서, ‘슬럼의 도전’에서도 슬럼에 도덕적 비난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인구 과밀, 열악한 비공식 주택, 안전한 식수와 위생설비의 부재, 주택보유의 불안정”이라는 고전적 정의를 유지했다.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는 “도시가 방치되는 속도는 경제적 불평등이 확산되고 공공투자가 철수되는 속도만큼이나 엄청나 멀미를 일으킬 지경”이라고 강조한다. 
세계적으로 지배적인 패턴은 빈민을 도심에서 몰아내는 것이지만, 미국식 차별 분리 방식의 재생산을 통해 빗장공동체가 도시를 단절과 닫힘의 생태계로 구조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식 차별 분리방식은 탈식민 중간계급이 도심을 피해 폐쇄형 교외 지역이나 이른바 가장자리 도시에 거주하는 방식을 뜻한다.  
빗장공동체는 이제 도시 생태계의 일상적 풍경이 되었다. 철저하게 거주자와 토지개발업자의 결탁으로 이루어진 빗장공동체는 자신들 만의 공간적 풍요와 안전을 바라는 중산층과 자본가들이 그 중심에 있다. 이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다른 집단으로부터 야기되는 범죄 위협과 오염의 위험에 대응하는 서비스에 기꺼이 정당한 값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이렇게 볼 때 빗장공동체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안전을 희구하는 부르주아와 도시의 총체적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슬럼의 경계를 거대한 장벽으로 가른다. 극단적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인간 삶의 틈새를 끊임없이 갈라 화해와 소통, 연대와 환대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도시계획가들에 대한 기대와 회의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은 빗장공동체가 점차 영역을 확장하게 된 원인을 ‘사는 것’(the lived)과 ‘지어진 것’(the built) 사이의 괴리, 지각·행동·신념으로 편집된 정신적 도시인 시테(cit)와 물리적 장소로서의 도시인 빌(ville)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방식으로 도시 만들기가 진행된 데서 찾았다. 
그 결과 도시는 확연한 경계로 분절된 빗장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빗장공동체는 끊임없이 계층 간의 사이를 넓히고 차이를 확산·증폭시키면서 동시에 계층의 단계를 쪼개는 배제와 차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대 도시에 공존과 공감, 조화와 공생의 생태계가 새롭게 터 잡을 수 있는 대안은 없는 것인가? 
세넷은 도시 계획가들이 빗장공동체 건설을 거부하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반대로 가야 한다고 요청하면서도 정의를 물리적 형태로 직설적으로 번역해 낼 방법은 없다고 그 한계도 지적한다. 
어쩌면 세넷의 도시 계획가들에 대한 기대와 회의는 불가피하다. 도시 계획가들이 이미 자본과 공모하는 삶에 익숙하고 도시 생태계가 완벽하게 여타 공동체와 절연된 ‘초 빗장 공동체’(ultra-gated community)로 진행되는 현실에서, 전통적 삶과 사유방식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희망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전체가 함께해야[公] 천하가 화평[平]해지고, 화평은 전체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얻어진다.”는 ‘여씨춘추’의 한 구절이 불현 듯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공평하고 올바르며, 또 어느 한편으로 기울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연대와 소통의 삶 길이 닫힌 공동체에서 트인 공동체로 전환하는 삶의 방식, 관계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렌트가 말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의 복원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맥락 없는 상고주의(尙古主義)에로의 회귀를 경계하면서, 전통적 사유와 삶의 방식에 살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장복동 <전남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article>
이전글
천주교광주대교구 사목국-전남대 가족커뮤니티연구단, ‘가정사목 공동 세미나’ 개최
다음글
전남대 인문학연구원-천주교광주대교구, 인문학과 종교의 상생 세미나